지난달 상견례를 시작으로 임금·단체협상에 돌입한 국내 완성차업계에서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정년 연장은 임금 개선과 함께 매년 임단협 시기마다 나오는 얘기지만, 전기차 시장 확대로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은 더 절박한 상황이 됐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구조가 단순해 생산인력이 덜 필요하다. 회사 입장에서는 기존 근로자의 정년을 늘리면 신규 채용을 줄여야 한다. 모빌리티 시장이 바뀌는 상황에 대비해 우수한 인력을 뽑아야 하는 회사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005380)기아(000270), 한국GM 등 완성차 3사는 이날부터 정년연장 국회 입법화를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 운동에 돌입한다. 이들은 국민연금 수령 시기인 만 65세와 정년이 연계될 수 있도록 정년 연장 법제화를 촉구하기 위해 청와대 국민청원을 게시하고 가족 및 지인에게 청원을 독려해 국회 입법까지 노린다는 계획이다. 3사는 성명서를 통해 “나이 60이면 한창 활동할 시기지만 은퇴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정년연장은 노동자에게 노후보장, 기업과 정부에는 고급 노동력과 세수를 제공하는 윈윈윈 정책”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상견례에서 마주 앉은 현대차 노사 교섭 대표들. /연합뉴스

매년 차업계 임단협의 쟁점은 임금 인상, 성과급 지급 등이었지만, 올해는 특히 정년 연장이 화두에 올랐다. 세계 각국이 내연기관차 퇴출 스케줄을 발표하고 완성차 제조사들이 앞다퉈 전기차를 내놓으면서다. 2025년 노르웨이 등 일부지역을 시작으로 2030년부터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에서 내연기관차 판매가 금지된다. 국회에서도 국내 내연차 판매 종식시점을 2030년으로 명시한 친환경차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내연기관차 퇴출은 완성차업계의 생산인력 감소로 이어진다. 전기차는 복잡한 설계의 엔진 대신 배터리가 들어가고 부품 수와 조립과정이 줄어 필요 인력이 적다. 이와 함께 스마트팩토리 도입도 빨라지고 있다. 글로벌컨설팅사 맥킨지는 지난 4월 보고서를 통해 향후 10년간 글로벌차산업 일자리의 25%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맥킨지는 제조인력(10%), 경영직군(6%) 인력감축보다 마케팅·판매·공급망관리 직군의 인력 감축(14%)이 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온라인 판매가 가속화되며 마케팅·판매 직군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최근 벤츠는 유럽 내 25개 직영 전시장을 모두 없애겠다고 발표했으며 국내에서는 올해 내로 차량구매 전과정을 온라인에서 진행하는 플랫폼을 개시한다.

맥킨지 보고서 '클린·전기·자율주행차 뒤의 저항할 수 없는 모멘텀' 발췌. /맥킨지

테슬라는 2019년부터 전세계 오프라인 매장을 없앴으며 BMW는 온라인 전용 모델들을 출시해 인기를 끌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미국 등 현지시장에서는 온라인 판매를 활발히 진행 중이나, 국내에서는 노조의 반대로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현대차노조 판매지부는 2025년까지 현대차 영업직 5480명 가운데 30.7%(1685명)가 60세 정년에 따라 퇴직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며 상위노조에 힘을 보태고있다.

현대차는 인위적인 구조조정대신 기존 인력을 재배치하고 자연감소분을 통해 인원 수를 조절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여전히 노조와 마찰이 크다. 노조는 지난해 ‘시니어 촉탁직' 확대를 요구해왔으나 올해는 아예 정년 연장을 주장하고 있다. 시니어 촉탁직은 2018년 현대차 임단협부터 합의된 개념으로, 60세 정년을 맞은 직원이 정년 후에도 1년간 계약직으로 기존의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한 직군이다.

하지만 미래 투자 및 먹거리를 고민하는 현대차로서는 노조의 요구를 무작정 받아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또 친환경차로의 전환이라는 흐름에 따라 개발직군 등 새로운 인력들을 고용해야하는데, 정년을 연장하면 고정비 부담이 커진다. 현대차는 지난 10년간 생산직군 인력을 공식적으로 채용하지 않았고, 2년전부터는 사무직군도 정기 공개채용에서 수시채용으로 전환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친환경차 도래 등 차 산업의 변화로 인력 수요 변화가 불가피하다. 노조는 사측이 새로운 필요인력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사측은 재교육을 통한 직군 재배치 등으로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고민할 시기”라며 “지금처럼 무작정 정년을 늘려달라는 요구는 오히려 생산기지를 해외로 내모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