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자회사를 상장(IPO)해 자금 조달에 나서려던 국내 중견기업들의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최근 정부가 중복상장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다.

중복상장은 모회사가 상장된 상태에서 핵심 자회사를 다시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모회사와 자회사 주주 간 이해상충이 발생하고, 모회사의 주가 하락 등 개인투자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한국거래소는 영업 독립성, 경영 독립성, 주주 소통 등을 중심으로 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원칙적으로 중복상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로 상장을 통해 자금 조달과 사업 확장을 추진하려던 중견기업들 사이에서는 계획 수정이나 일정 지연 가능성이 거론된다.

일러스트=챗GPT 달리3

상장을 추진하던 해운·항만 IT 설루션 기업 '싸이버로지텍'은 최근 재검토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한진그룹에서 분리된 유수홀딩스(000700)(옛 한진해운홀딩스)의 핵심 자회사로 최은영 회장이 이끌고 있다. 최 회장은 고(故) 조수호 한진해운 전 회장의 배우자이자,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숙모다.

유수홀딩스는 2014년 한진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해운 중심 사업에서 물류·IT 중심으로 구조를 전환해왔고, 싸이버로지텍은 그 성장의 핵심 축 역할을 해왔다. 싸이버로지텍은 2019년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했지만 실적 둔화와 밸류에이션 부담으로 절차를 중단한 바 있다. 이후 실적을 회복해 지난해 매출 1254억원, 영업이익 323억원을 기록하며 IPO 재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유수홀딩스가 싸이버로지텍 지분 53.16%를 보유하고 있어, 중복상장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최근 한국거래소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지만, 심사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회사는 상장 추진 여부를 두고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싸이버로지텍 관계자는 "상황을 지켜보며 코스닥 상장을 포함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중견기업 한컴그룹 계열 AI 데이터 분석 기업 '한컴인스페이스'도 상장 도전에 제동이 걸렸다. 한컴인스페이스는 지난해 8월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지만 올해 2월 미승인 결론을 받았다. 최대주주인 한글과컴퓨터(030520)가 28.32%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구조로, 중복상장 이슈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한글과컴퓨터는 현재 한컴인스페이스 매각도 검토 중이다. 한컴인스페이스는 김상철 한컴그룹 회장의 장녀인 김연수 한글과컴퓨터 대표가 2020년 인수한 회사로, 위성과 드론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AI로 분석하는 플랫폼 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매출 234억원, 영업손실 29억원을 기록하는 등 실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매각이 현실적인 선택지로 거론되고 있다.

남민우 회장이 이끄는 통신장비 분야 중견기업 다산그룹도 유사한 구조적 과제를 안고 있다. 다산그룹 계열 열교환기 제조사 디티에스는 지난해 9월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지만 현재까지 결과를 받지 못하고 있다.

디티에스는 코스닥 상장사 다산네트웍스(039560)가 지분 37.69%를 보유하고 있고, 다산네트웍스는 또 다른 상장사인 다산솔루에타(154040)가 26.98% 지분을 보유한 구조다. 자회사와 손자회사까지 이어지는 상장 구조로, 중복상장 이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다.

디티에스는 2018년부터 상장을 준비해 왔고, 실적 개선을 통해 상장 기반을 다져왔다. 지난해에는 매출 1427억원, 영업이익 250억원을 기록했다. 회사 측은 "사업과 경영 측면에서 모회사와 겹치는 부분이 없고 독립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복상장 규제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일률적인 적용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다. 한 자본시장 전문가는 "중복상장 규제는 주주 보호 측면에서 필요하지만, 성장성이 높은 자회사까지 제한할 경우 기업의 투자 여력과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며 "지배구조 투명성과 주주 보호를 확보하면서도 기업 성장 기회를 함께 고려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