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는 엔비디아라는 거대 플레이어가 있죠. 미국에서 엔비디아와 맞붙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디지털 주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럽에선 승산이 있다고 봤습니다. 엔비디아의 대안이 얼마든지 환영받을 수 있어요.”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 투자사인 코렐리아캐피탈의 피에르 주 한국 대표는 지난 20일 여수에서 조선비즈와 만나 투자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스타트업 창업자, 투자사 등이 모이는 연례행사인 ‘스타트업 생태계 콘퍼런스 2024′에 참석차 여수를 찾았다.

디지털 주권은 유럽에서 활동하는 미국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 취득·이전을 견제하는 것을 말한다. 유럽연합(EU)에서 시행 중인 ‘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이 대표적이다.

한국계 프랑스인 주 대표는 파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파리 경영대학원을 마치고 마케팅 분석회사 넷인텔리전즈를 창업했고 유명 컨설팅 회사 아탈리&아소시에 파트너를 지낸 뒤 코렐리아캐피탈 창업 멤버로 합류했다. 2022년 한국 법인이 설립되면서 이곳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피에르 주 코렐리아캐피탈 코리아 대표는 "'미스트랄 AI’ 같은 프랑스 유망 LLM(대규모 언어 모델) 개발사에도 투자한 만큼 여기에 리벨리온 칩이 들어갈 수도 있도록 시너지를 염두에 두고 투자한 것”이라고 했다. /여수=장우정 기자

리벨리온은 올 초 88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1650억원(시리즈B)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는데, 여기에 코렐리아캐피탈이 이름을 올렸다.

리벨리온은 최근 SK텔레콤(017670) 계열 또 다른 AI 반도체 회사인 사피온코리아와 합병을 전격 발표했다. 글로벌 AI 인프라 전쟁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2020년 9월 박성현 대표가 오진욱 최고기술책임자(CTO) 등과 공동 창업한 리벨리온은 현재까지 AI 반도체 2개를 출시했다.

주 대표는 “리벨리온은 그간 2대 주주인 KT(030200)와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유럽에 있는 많은 통신사와 연결해 준다면 다양한 비즈니스 기회가 생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었다”며 “코렐리아는 (최근 삼성·엔비디아 등으로부터 9000억원을 투자 받은)‘미스트랄 AI’ 같은 프랑스 유망 LLM(대규모 언어 모델) 개발사에도 투자한 만큼 여기에 리벨리온 칩이 들어갈 수도 있도록 시너지를 염두에 두고 투자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실사가 막 시작됐고 기술 검증 등에 2개월가량은 소요될 전망이기 때문에 (당장 대박 등을 논하기엔) 이르다”며 웃어 보였다.

한인 입양아 출신으로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 문화부 장관 등을 지낸 플뢰르 펠르랭이 20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업한 것으로 잘 알려진 코렐리아캐피탈은 우리 돈 1조원대(약 7억유로)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첫 조성 펀드에 네이버(NAVER(035420))가 3000억원(약 2억유로)을 100% 출자하는 등 한국과 인연이 깊다. 주로 유럽, 한국에 있는 시리즈B 이상의 검증된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챗 GPT를 내놓은 ‘오픈AI’의 대항마로 설립 반년 만에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 반열에 오른 미스트랄AI뿐 아니라 유럽 최초의 차량 공유 서비스 ‘볼트(에스토니아)’, 투어·액티비티 상품을 제공하는 온라인 여행 플랫폼 ‘겟유어가이드(독일)’, 중고 명품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프랑스)’ 등 유니콘 기업에 투자했다. 국내에선 리벨리온 외에 마이리얼트립이라는 여행 플랫폼에 투자했다.

리벨리온의 AI 반도체가 탑재된 아톰카드. /리벨리온 제공

주 대표는 “여행 플랫폼은 레드오션(경쟁이 치열해진 시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해외로 나가는 자유여행객의 취향을 고려한 상품 위주로 선보이는 마이리얼트립의 경쟁력은 지속될 것이라고 봤다”면서 “특히 유럽에선 코렐리아의 현지 네트워크를 이용해 와인 시음이나 누구도 못 가는 공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의 상품 구성을 돕고 있다. 차별화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최근 유럽에선 한류 열풍에 따라 한국 시장과 스타트업이 매력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명품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로레알 등 소비자 대상 주요 브랜드까지 국내 스타트업과 손잡고 있다.

이에 코렐리아도 유럽에서 한국에 진출하거나 반대로 국내에서 유럽으로 나가려 하는 경쟁력 있는 프리미엄·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 투자하는 관련 펀드를 1억유로(약 1490억원) 규모로 조성하기로 하고 자금을 모으고 있다. 연내 선보일 예정이다. 코렐리아가 브랜드 전용 펀드를 조성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 대표는 “그만큼 한국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브랜드가 많아지고, 또 여기서 검증받았을 경우 인근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로 사업을 확대하기에 좋다는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이 일본,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유럽도 해외 진출 지역으로 고려해 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주 대표는 “유럽은 GDPR을 비롯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같은 규제를 만들어 나가고 있고, 이는 시차를 두고 미국 등 전 세계로 확산·적용되고 있어 이곳에서 규제에 대비해 사업 구조를 선제적으로 만들어 나가면 경쟁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코렐리아캐피탈은 현재 투자 전 실사 과정에서 ESG 기준을 접목했으며, 포트폴리오사가 될 경우 ESG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 설정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는 출자자들의 수요에 따른 것이다.

주 대표는 또 “코렐리아는 투자 과정에서 유럽 현지 대기업과 어떻게 사업적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를 우선순위로 보고, 실제 이들 기업에 테스트(검증)를 부탁하는 등 절차를 거치고 있다”면서 “이들과 연결할 수 있는 섹터(업종)나 시설 투자가 많이 들지 않는 기업용(B2B)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모델 투자를 가장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