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 영향으로 완성차 업체들이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선 가운데 2차전지(배터리) 장비사 가운데 전극공정 업체 3사 수주는 계속 증가세를 이어가는 것으로 나타나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배터리 제조의 첫 단계인 전극공정은 배터리의 기본 성분을 배터리 양극, 음극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픽=손민균

22일 증권정보제공업체 세종기업데이터에 따르면, 피엔티(137400)의 올해 1분기 배터리 전극공정 수주잔고는 1조8927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같은 기간 티에스아이(277880)도 4659억원으로 분기 수주잔고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다. 1년 전(2327억원)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규모다.

씨아이에스(222080)(CIS) 수주잔고도 8796억원으로 전 분기(8994억원)보다 소폭 줄었으나 1년 전(7681억원)보다는 늘어나는 등 증가 추세를 이어갔다.

수주잔고는 시차를 두고 매출로 인식되기 때문에 실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주요 지표 중 하나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전극공정 장비는 다른 공정 대비 리드타임(주문~인도까지 소요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에 고객사 발주가 가장 먼저 나온다”며 “전극공정 장비업체들의 수주 동향이 장기적으로 캐즘이 지속될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했다.

전극공정 장비의 경우 주문을 받아 인도하기까지 통상 2년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정도가 걸리는 다른 공정 장비의 두 배 수준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실제 배터리 장비사 가운데서도 전극공정을 제외한 다른 장비사들 사이에서는 수주잔고가 주춤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양극·음극판을 분리막과 함께 셀 형태로 제조하는 조립공정 장비사인 하나기술(299030)의 경우 1분기 수주잔고가 3722억원으로 작년 3분기(3923억원)에서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활성화하는 화성공정의 에이프로(262260) 수주잔고도 2389억원으로 3분기(2420억원)에서 다소 줄어들었다.

BMW 5시리즈 전기차(i5)가 충전하고 있다. /조선DB

이는 전기차 업체들이 캐즘에 대응해 생산량을 줄이거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전략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 2위 자동차 기업 포드는 최고 인기모델인 F-150 픽업트럭의 전기차 버전인 ‘F-150 라이트닝’의 생산량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토요타·닛산 등은 미국에서 딜러들에게 지급하는 전기차 판매 장려금을 2배로 늘리며 판매 둔화세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현대차(005380)는 올 하반기 캐스퍼 일렉트릭을 선보이는 등 ‘가성비 전기차’로 위기 돌파에 나설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가격이 내연기관차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는 성장 정체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금리 인하가 늦어지고 있는데다 각국 정부가 관련 보조금을 줄이고 있어서다.

전기차를 사려는 사람은 다 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열릴지도 변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친환경 산업 육성 투자를 줄이겠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관건은 가격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업계에서 가성비 전기차를 내놓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지만, 배터리값을 낮추거나 제조 공정 자동화 등을 통해 ‘반값 전기차’ 수준이 되기까지는 3~4년이 걸릴 수 있다”며 “그전까지는 하이브리드차가 강세를 보이다 이후 전기차가 대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성장 정체가 얼리어답터(빠른 소비자), 보조금에 힘입어 폭발적 성장세를 이어가던 전기차 시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도 덧붙였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지난해 세계 각국에 등록된 전기차가 총 1377만대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전년 동기보다 30.6% 증가하는 데 그친 것이다. 전기차 성장률은 2021년에는 세 자릿수, 2022년에는 60%대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