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시간을 비껴가는 인간도 없다. 세월의 흐름 앞에서 인류는 늘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찾아오는 노화와 쇠퇴를 두려워했다. 동시에 오랜 시간이 더해준 깊이와 지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공존했다.
때로 인간에게 노화가 두려움인 것과 달리, 포도나무에 나이 듦은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성장 동력이다.
학계에 따르면 포도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매해 30~60cm씩 더 깊게 뿌리를 내린다. 수령 50년이 넘은 나무는 지하 6~7m까지 뿌리를 뻗는다.
포도나무는 50년 이상 자라면 양적인 풍요로움 대신 질적인 충만함을 선택한다. 마치 노년에 다다른 지혜로운 이가 젊은 날 성급함을 반성하고 고요한 통찰을 고르듯 조용히 더 깊은 땅속으로 파고든다.
호주에서 이뤄진 한 와인 연구에 따르면, 40년 이상 묵은 포도나무에 매달린 포도 열매는 항산화 물질과 페놀 화합물 함량이 최대 30% 더 높다. 마치 인간이 나이 들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줄어들지만, 내면으로 깊이가 더해지는 모습과 닮았다.
와인 산업에서도 이런 양면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량 생산을 추구하는 현대식 와이너리들은 20~30년 된 포도나무를 어린 묘목으로 바꾼다.
와인 업계에서는 포도나무가 25년을 넘기면 청년기가 지났다고 본다. 이때부터 포도나무는 스스로 수확량을 조절한다. 젊은 나무처럼 열매를 왕성하게 맺지 않는다. 대신 포도송이 하나하나에 영양분을 더 집중적으로 전달한다. 가늘고 깊게 이어진 장년기 포도나무 뿌리는 토양 중심부까지 뻗어나가 미네랄과 영양분을 빨아들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렇게 섭취한 여러 미네랄과 양분이 와인에 복합적인 풍미를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소규모 생산자들은 수십 년 된 포도나무를 비에이유 비뉴(Vieilles Vignes) 혹은 올드 바인(Old Vine)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와인은 생산량이 적어 시중에서 더 비싼 값에 팔린다.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진딧물들이 유럽 전역을 강타한 이후, 현대식 와이너리와 소규모 생산자 간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당시 유럽 전역 포도나무들이 일제히 말라 죽어가기 시작하자, 소규모 생산자들은 필사적으로 오래된 포도나무를 지켰다. 이들은 밭을 갈아엎거나, 새 포도나무를 심지 않았다. 대신 오래 키운 기존 포도나무를 진딧물 저항력이 강한 미국산 대목에 접붙여 위기를 극복했다. 지금도 프랑스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이때 접붙인 포도나무들이 100년이 넘은 살아남아 오래된 포도나무가 가진 가치와 생명력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모든 와인 전문가들이 오래된 포도나무 가치를 인정하진 않는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마스터 오브 와인(MW) 팀 앳킨은 “포도나무 나이와 와인 품질 사이의 직접적 상관관계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생산자들이 와인 가격을 올리는 마케팅 수단으로 포도나무 수령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세계적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극심한 기후 변화 속에서도 오래된 포도나무가 만들어내는 와인은 놀라운 안정성을 보여준다”며 시간이 부여한 특별한 가치를 인정한다.
제라르 베르트랑 역시 오래된 포도나무가 가진 잠재력을 믿는 와인 생산자다. 그는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역을 상징하는 유명 양조가다. 그는 1992년 아버지로부터 와이너리를 물려받아 이 지역에 생물역학농법(Biodynamic)을 선제적으로 도입했다. 생물역학농법은 중세부터 전해온 고전적인 포도 재배 농법이다. 살충제는 물론 유기농 비료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포도나무와 토양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도록 퇴비만 조금 사용한다.
제라르 베르트랑 뀌베 100은 그가 가진 양조 철학을 집약한 와인이다. 이 와인은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들만 모인 특별한 구획에서 포도를 수확해 만든다. 이 와인에 쓰이는 포도나무들은 두 차례 세계 대전과 수많은 기후변화를 견뎌내며 살아남았다. 깊이 뻗은 뿌리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오는 극심한 더위와 가뭄도 이겨냈다.
베르트랑은 오래된 포도나무가 보여주는 복잡함을 한층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산 참나무통에서 이 와인을 18개월 동안 숙성했다. 참나무통은 보통 와인에 부드러운 풍미를 더하는 동시에, 미세한 산소 교환을 도와 와인이 더 균형 잡힌 맛을 갖도록 돕는다.
시간의 결정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와인은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구대륙 레드와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하이트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