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주류(酒類) 업계 주식 투자자들은 예년보다 더 씁쓸한 한 해를 보냈다. 전 세계 증시에 상장한 주요 주류 관련 종목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변동성이 큰 장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주류 관련 종목들은 통상 죄악주(罪惡株·sin stocks)에 속한다. 죄악주란 담배, 카지노 관련주와 함께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장 기업의 주식을 뜻한다.
죄악주는 평소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다가 약세장이 찾아올 때마다 빛을 발하는 종목으로 꼽힌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1년 유로존 경제 위기처럼 경기 침체기마다 죄악주는 효자 역할을 했다. 주류 회사들은 대체로 배당 성향도 높아 경기 침체기에도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는 달랐다. 위기 때 유난히 달콤했던 술 관련 주식들은 지난해 그 명성이 무색할 만큼 쓰디쓴 성적을 기록했다. 국가와 상관없이 상장한 증권시장을 대표하는 지수보다 주가가 더 떨어진 종목이 부지기수였다.
6일 조선비즈가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중국, 우리나라 등 주요국 증시에 상장한 주류 관련 종목 30여 개를 살펴본 결과 지난해 영국 디아지오, 프랑스 페르노리카와 레미 코인트로, 이탈리아 캄파리 같은 글로벌 대형 주류 기업 주가는 각각 상장한 주가지수보다 최대 40%포인트 이상 더 하락했다.
세계 최대 주류기업 디아지오는 주가가 10.9% 내렸다. 같은 기간 영국 FTSE100 지수는 반대로 5% 넘게 올랐다. FTSE100 지수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종목 가운데 시가총액 순서대로 100개 기업 주가를 지수화한 종합 주가 지수다.
디아지오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여러 주류 브랜드를 취급한다.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조니워커와 세계 1위 흑맥주 기네스, 보드카 스미노프가 디아지오 소유다.
프랑스 종합주류기업 페르노리카 역시 CAC40 지수보다 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CAC40 지수가 올해 2.9% 하락한 가운데, 페르노리카 하락률은 30%를 넘어섰다. 페르노리카는 스카치 위스키 발렌타인과 로얄살루트 등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인 코냑 레미 마르탱을 보유한 레미 코인트로 그룹은 글로벌 주류 회사 가운데 가장 성적이 좋지 않았다. 이 회사 주가는 지난해 48%가 떨어져 반토막이 났다.
◇ 美·中 주류 시장 침체에 타격
이들은 세계적인 주류 소비시장 가운데 두 축으로 꼽히는 미국과 중국에서 술 수요가 줄어들자 지난해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레미 코인트로 그룹은 지난해 실적 발표 이후 성명서를 내고 “미국에서 주류 기업이 벌이는 마케팅·홍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정작 소비자 수요는 줄었다”며 “중국 시장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도 침체기를 맞았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자본시장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 종합주류기업 콘스텔레이션 브랜드는 지난해 9% 하락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 지수는 같은 기간 13% 가까이 올랐다. 콘스텔레이션 브랜드는 맥주 브랜드 코로나와 와인 브랜드 로버트 몬다비, 슈레이더 셀러 등을 거느린 거대 기업이다. 이 기업에 속한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는 지난해 영국 매체 윌리엄 리드가 선정하는 세계 최고 포도밭으로 꼽혔지만, 주가 부양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 테네시 위스키 잭 다니엘을 판매하는 브라운포맨도 지난해 33% 내렸다. 이 회사는 2023년 경영이 어려워지자 보유하고 있던 보드카 브랜드 핀란디아를 코카콜라에 매각했다. 올해는 소노마 커트러 와이너리를 5000만달러(약 735억원)에 팔았다. 하지만 간판 브랜드 잭 다니엘의 부진을 만회하진 못했다.
◇ 한·미·일 대형 맥주 브랜드도 힘 못써
다른 주류에 비해 값이 저렴하고, 필수 소비재에 가까운 맥주도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다. 오비맥주를 가진 세계 최대 맥주 기업 앤하이저부시인베브는 올해 주가가 18% 하락했다. 북미에서 두 번째로 큰 맥주 브랜드 몰슨쿠어스도 올해 주가가 8% 이상 내렸다.
일본 맥주 시장 점유율 1위 기업 기린홀딩스는 올해 주가가 2% 빠졌다. 같은 기간 닛케이평균은 20% 가까이 올랐다. 일본 맥주 업계는 매년 줄어드는 맥주 소비량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내 맥주 소비량은 1994년 706만킬로리터로 정점을 찍은 이후 계속 줄고 있다. 일본은 2007년 초고령화 사회 진입 이후 고질적인 소비 경기 침체 문제를 겪는 중이다. 기린홀딩스에 따르면 2021년 일본 내 맥주 소비량은 210만킬로리터까지 내려갔다. 27년 만에 맥주 소비량 70%가 증발했다.
최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젊은 층에서도 술을 마시는 인구가 줄었다. 지난해 일본 인터넷 업체 빅로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본 20~24세 가운데 80%는 ‘일상에서 술을 마시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중국에서는 상하이 증시에 속한 칭따오 맥주가 ‘오줌 맥주’ 논란에도 14% 올랐다. 다만 상하이종합주가지수 역시 지난해 14.8% 뛰어 지수 상승률에는 미치지 못했다.
오로지 일본 맥주 브랜드 가운데 산토리식품인터내셔널만이 지난해 주가가 소폭 상승했다. 산토리식품인터내셔날은 일본 내 맥주 순위에서 아사히와 기린 2강에 밀려 10%대 점유율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다른 주류사와 다르게 맥주뿐 아니라 야마자키, 하쿠슈, 히비키 같은 주요 위스키 브랜드와 호로요이 같은 충성도 높은 하이볼 브랜드를 보유했다.
◇ 국내에선 지난해 주인 두 번 바뀐 제주맥주만 급등
우리나라 증시에 상장한 술 관련주들 역시 맥주, 소주, 전통주를 가릴 것 없이 별다른 수혜를 입지 못했다. 유가증권 시장과 코스닥 시장이 그야말로 치욕스런 한 해를 보낸 탓이다. 올해 국내 유가증권시장 코스피 지수 등락률은 블룸버그가 집계하는 아시아·태평양 주요 주가지수 87개 가운데 76위였다. 심지어 코스닥 지수는 꼴찌인 87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창립 100주년을 맞았던 하이트진로(000080)는 코스피 지수보다 2%포인트 덜 하락했지만, 2023년에 비해 주가가 13%나 떨어졌다. 보해양조(000890), 국순당(043650) 역시 주가가 모두 두 자릿수 넘게 빠졌다.
제주맥주만이 코스닥 지수가 23% 내리는 가운데, 무려 주가가 170% 급등했다. 창사 9년 만에 경영권을 매각하면서 지난해 두 차례 최대주주 손바뀜이 일어난 덕이다.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는 전문가를 인용해 “투자자 관심이 성장주에서 가치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주류 관련주에 대한 이전보다 세밀한 분류(segmentation)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증시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어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고급 주류 중심 포트폴리오를 가진 상장 기업들은 이전 같은 성장 동력을 갖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소비자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 대형 주류기업이 보유한 고급 와인이나 스카치 위스키 같은 고가 주류 소비가 올해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