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와중에도 오픈런(개점과 동시에 뛰어가서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선 10층으로, 현대백화점 압구정점에선 지하 2층으로 사람들이 뛰어갑니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은 5층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달려가는 곳은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등 명품 매장이 몰려있는 층도 아니도, 인기 디저트를 파는 층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달리는 걸까요? 무엇을 사기 위해서일까요?
16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들이 원하는 것은 꽤나 구체적입니다. 명품 키즈 의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이즈를 사기 위한 것입니다. 매장 직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13~14살짜리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을 위한 옷이 가장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키즈 의류매장의 한 관계자는 “애초에 입고 수량도 많지 않아서 더 경쟁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생마저도 명품 소비에 눈을 뜬 것이냐며 혀를 끌끌 차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소비는 아이들을 위한 소비가 아닙니다. 어른을 위한 ‘알뜰 소비’입니다. 아이들 옷을 즐겨 입는 어른들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으로 잘 팔리는 옷은 펜디 키즈가 판매하는 판초입니다. 펜디 로고가 박혀있고 양면으로 입을 수 있는 상품인데 펜디에서 파는 성인용과 디자인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가격은 좀 차이가 납니다.
펜디 성인 판초의 가격은 소재나 디자인에 따라 다르지만 180만~445만원 수준입니다. 여기서 사지 않고 펜디 키즈에서 비슷한 느낌의 판초를 사면 30만~80만원까지 싸게 살 수 있습니다. 길이가 좀 짧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키 160~165cm의 마른 여성이라면 오히려 어린이용이 거추장스럽지 않다는 후기도 흘러나옵니다.
몽클레어 키즈에서도 비슷한 상품이 있습니다. 바로 몽클레르 키즈에서 파는 뉴마야 패딩 재킷입니다. 이 상품은 120만원 수준인데 같은 디자인의 성인용 제품인 마야 패딩 재킷은 220만원 수준입니다. 약간 마르고 키가 작은 편이라면 100만원 정도 아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유통업계에서는 명품 소비 영역에도 알뜰 소비 바람이 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소비 욕구를 해외 직구로 풀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끝난 다음 날,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에 적극 뛰어들어 해외 직구에 나서면 명품도 싸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환율을 생각하면 예전만큼 싸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 빠른 소비자들 일부가 키즈 명품 의류 구매로 방향을 돌린 것입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키즈 명품 매장의 20대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년 대비 15% 높아졌다고 합니다. 물론 소비에 나선 20대 여성이 모두 본인을 위한 소비라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선물 수요일 수도 있고 진짜 아이를 위한 소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장 직원들의 전언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소비는 대부분 명품 의류를 싸게 구입하려는 알뜰족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한 매장 직원은 “매장에 뛰어와서 가장 큰 사이즈를 묻고 입어보는 경우가 많아서 본인 옷을 사러 왔다고 짐작하곤 한다”고 했습니다.
정치 불안에 산업 경쟁력에 대한 의구심이 나오면서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미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최근 1430원대를 기록하고 일부에서는 환율이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어린이 옷 입는 어른이. 고환율 시대에 틈새 소비는 이렇게도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