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전 세계 최대 주류 소비시장 미국에서는 ‘ABC 운동(movement)’이 벌어졌다. 1995년 8월 뉴욕타임스(NYT)는 ‘20년 동안 미국 와인 문화 초석(礎石)을 쌓은 포도 품종이 거센 반발을 맞았다’고 한 면을 털어 대서특필했다.

샤르도네라는 포도 품종은 ‘화이트 와인의 여왕’이라 불린다. 와인을 잘 모르는 소비자도 여러 차례 들어봤음직 한 품종이다.

이 품종은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무럭무럭 자란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다. 열매를 빠르게 맺고, 어느 토양에서나 생산량이 풍성하다. 시거나, 달지 않고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양조자가 원하는 대로 맛을 그려내기 좋다. 이런 도화지 같은 특징 때문에 샤르도네는 전 세계 수많은 양조자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샤르도네는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소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 계기였다. 파리의 심판은 ‘프랑스 와인이 아닌 와인은 와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1970년대 중반 당시,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와인 겉면을 가린 채 하는 시음회)한 이벤트를 말한다.

이 시음회에서 미국산 샤르도네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들은 내로라 하는 프랑스산 화이트 와인을 앞지르고 수위를 차지했다. 이 이벤트를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미국 와인 지위는 일취월장했다. 미국산 샤르도네 와인이 가진 가치를 몰랐던 미국인들도 뒤늦게 이 포도에 열광했다.

그래픽=손민균

이후 전 세계 와인 시장에는 무수히 많은 미국산 샤르도네 와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파리의 심판에서 1위를 차지했던 ‘샤토 몬텔레나’ 와인을 따라 하기 바빴다.

1994년 샤르도네는 역사상 처음으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 품종’ 자리에 올랐다. 미국 바깥 나라에 수출하는 물량도 1990년대 들어 매년 12% 이상 늘었다.

포도 재배량은 수요가 늘었다고 해서 갑자기 늘릴 수 없다. 포도 묘목이 와인을 담글 만큼 튼실한 열매를 맺으려면 수년간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와인 생산자들은 갑자기 늘어난 수요에 맞추기 위해 포도 열매를 덜 솎아내는 식으로 생산량을 늘렸다. 한 묘목에 달리는 포도 열매가 많아질수록 와인이 담을 수 있는 풍미는 옅어진다.

생산자들은 이런 결점을 덮기 위해 참나무(오크)통에 와인을 오래 담근 후 시장에 내놨다. 참나무통을 일종의 조미료 역할로 사용한 셈이다. 나무에서 배어 나오는 버터와 바닐라향이 와인에 깊게 배자 소비자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으레 조미료를 많이 넣은 음식이 그렇듯, 미국 소비자들은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이런 와인들에 금세 지쳤다.

이윽고 ABC 운동에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와인바에서 샤르도네를 시키는 소비자를 ‘와인 맛 모르는 초보자’로 취급했다. 소믈리에들은 버터향이나 바닐라향이 강한 미국산 샤르도네 와인 대신 다시 프랑스산 화이트 와인을 구비했다.

어둠은 오래가지 않았다. 허드슨 랜치 창립자 리 허드슨은 1981년 일찍이 미국 최고 와인 산지로 꼽히는 나파 밸리에 터를 일궜다. 전 세계에서 미국산 화이트 와인 수요가 절정으로 치솟았을 무렵이다. 그는 미국에서 샤르도네라는 품종이 슈퍼스타로 떠올랐다가 다시 추락하는 광경을 온전히 지켜봤다.

그는 나파에서 가장 남쪽 로스 카네로스 지역에 250만 평에 달하는 포도밭을 보유했다. 여기서 키운 포도는 키슬러, 콩스가드, 오베르 같은 내로라하는 캘리포니아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데 쓰였다. 모두 국내 판매가가 최소 수십만원에서 최대 백만원을 웃도는 고가 와인이다.

허드슨은 포도를 공들여 키워 이들 브랜드에 그저 공급하기만 했다. 이윽고 2004년에야 스스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ABC 운동이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미국 소비자들이 다시 이전처럼 신선하고 우아한 미국산 샤르도네를 기대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만든 허드슨 랜치 와인은 시장에 나오자마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비자들도 열광했다. 허드슨이 선보인 와인은 같은 밭에서 키운 포도로 만든 다른 브랜드 와인보다 훨씬 저렴했다. 하지만 품질은 그에 못지않았다.

주요 와인 평론가들은 그가 만든 와인에 초기부터 90점이 넘는 고득점을 줬다. 특히 2019년 허드슨 리틀 빗 샤르도네는 ‘와인 대통령’ 로버트 파커로부터 만점에 가까운 99점을 받았다.

허드슨 카네로스 샤도네이는 이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와인이다. 이 와인은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신대륙 화이트 와인 10만원 이상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 수입사는 와인투유코리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