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소비자라도 보졸레 누보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한때 매년 이맘때면 여러 매체가 보졸레 누보를 마실 때가 왔다고 분위기를 띄웠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부르고뉴 남쪽 보졸레 지방에서 만드는 햇와인(뱅 드 프리뫼르·vin de primeur)이다. 매년 9월 초에 수확한 포도를 숙성해 11월 셋째 주 목요일 선보인다. 수확부터 판매까지 기간이 채 석 달이 안 걸릴 정도로 짧다. 보졸레 누보는 이 점에 착안해 ‘그해 가장 먼저 선보이는 신선한 와인’이라고 스스로 포장했다.

올해도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법에 따라 11월 21일 자정을 1분 넘긴 시각부터 전 세계에서 동시에 와인 판매를 시작했다.

이 독특한 마케팅 방식은 저렴한 와인이 부가가치를 높인 사례로 경영 서적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보졸레 출신 유명 프랑스 방송인 베르나르 피보는 “보졸레 누보가 거둔 놀라운 성공을 이해하려면 와인 전문가보다 심리학자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보 말대로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현지에서도 여전히 와인 전문가가 평가할 만큼 심오한 와인은 아니라는 취급을 받는다. 보졸레 누보는 통나무통에서 숙성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고급스러운’ 와인에서 기대할 만한 향이 거의 나지 않는다.

와인의 뼈대를 만드는 타닌 성분이 거의 없어 입안에서도 쉽게 넘어간다. 법적으로 술을 빚는 도중 설탕(당분)을 넣어 달콤한 맛을 인위적으로 더할 수도 있다. 은근한 장미 사탕과 설익은 바나나 껍질에서 나는 향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게 대중적인 보졸레 누보의 맛이다.

보졸레 누보 애호가들은 이 맛을 ‘자극적이지 않고 여운이 있다’고 표현한다. 반면 ‘이도 저도 아닌 싱거움을 설탕으로 채운 맛’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국내에서도 보졸레 누보는 2000년대 초중반 11월 셋째 주만 되면 한동안 편의점과 대형마트 와인 판매대를 장식했다.

그러나 와인에 대한 소비자 눈높이가 이전보다 높아지고, 취향도 다양해지면서 보졸레 누보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이제 단순히 프랑스 햇 와인이라는 딱지 만으로는 선택받기 어려운 시기가 닥쳤다.

그래픽=정서희

이 자리는 보졸레 누보와 비슷하지만, 정체성이 분명한 다른 와인들이 채웠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 주요 와인 국가에서 온 피노누아가 대표적이다. 피노누아는 보졸레 누보를 만드는 가메(Gamay) 품종의 아빠뻘 되는 포도다.

가메는 프랑스에서 적포도 품종 피노누아와 청포도 품종 구애블랑을 교잡해 만들었다. 덕분에 잘 만든 가메는 피노누아 성격을 띄기도 한다. 반대로 여리게 만든 피노누아 역시 질 좋은 가메와 비슷한 맛과 향을 지닌다.

다만 피노누아는 여러 포도 품종 가운데 유난히 재배하기 어려운 품종으로 악명이 높다. 이 품종은 껍질이 얇고 포도알이 빼곡히 열린다. 얇은 껍질에 곰팡이가 슬면 열매 하나를 통째로 버려야 한다. 기후에도 민감하다. 조금만 추우면 포도가 설익어 싱거운 와인이 버린다.

칠레 중부 해안가는 피노누아를 대량으로 재배하기에 전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좋은 곳이다.

칠레 하면 와인 애호가들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카르메네르 품종으로 만든 진하고 남성적인 와인을 떠올린다. 이 와인들은 주로 안데스산맥을 뒤로 한 내륙 지방에서 만든다.

반면 피노누아를 키우기에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서늘한 태평양 인근 도시들이 더 적합하다. 칠레 중부 레이다 밸리처럼 바닷가 바로 앞에 자리 잡은 도시가 명산지다.

레이다 밸리는 바닷바람이 산을 타고 불어오는 골짜기다. 낮에는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지만, 밤에는 차가운 훔볼트 해류 영향으로 시원하다. 훔볼트 해류는 남아메리카 대륙 서쪽에서 적도를 향하는 흐름 가운데 가장 큰 해류다.

이 지역 피노누아는 잘 찾아보면 놀랍도록 저렴한 와인들이 많다. 대규모 경작을 통한 상업화에 익숙한 칠레 농업 특성 덕이다. 물론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좋은 와인은 수십만원을 호가한다. 그러나 피노누아가 갖춰야 할 기본적 덕목을 갖춘 보급형 와인은 프랑스 현지 보졸레 누보 가격보다 저렴하다.

레이다 레세르바 피노누아가 대표적이다. 이 와인은 칠레 해안도시 산안토니오 인근 포도밭 두 곳에서 키운 피노누아 품종 포도를 모아 만든다. 이 밭은 뱀처럼 길게 뻗은 칠레에서도 바닷가와 가장 가까운 밭으로 꼽힌다. 해안가에서 포도밭까지 거리가 4킬로미터에 그친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은 포도는 천천히 익는다. 서서히 익은 포도는 맛과 향이 다채롭고, 신선함을 강조할 수 있는 산도가 높아진다. 일부 와인 전문가들은 해안가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은 독특한 소금기와 짭조름함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칠레 거대 와인그룹 가운데 한 곳인 VSPT는 이 와인을 만들기 위해 마이포 강에서 포도밭까지 8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수로를 새로 뚫었다. 2007년에는 당시 와인 업계에서 젊은 생산자로 떠오르던 비비아나 나바렛을 수석 와인 양조가로 초빙했다. 그는 레이다 이름으로 피노누아 와인을 만들며 2020년 유명 평론가 팀 앳킨이 뽑은 올해의 와인 메이커에 올랐다.

영국 와인 전문매체 디캔터는 2022년 20파운드(약 3만원) 이하 전 세계 피노누아 가운데 레이다 리세르바 피노누아를 최고로 꼽으면서 “우아하고 가치가 높은 와인으로, 활기찬 산미와 사랑스러울 정도로 신선한 과일 향을 뿜어낸다”고 평가했다.

레이다 레세르바 피노누아는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신대륙 레드와인 3만원 이하 부문 대상을 받았다. 국내에는 금양인터내셔날이 수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