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증류주 데킬라가 ‘저렴한 클럽 술’이라는 오명(汚名)을 지우고 있다.

올해 국내에는 최소 수십만원에서 최대 수백만원에 달하는 고가 프리미엄 데킬라가 줄줄이 상륙했다. 이들 제품은 이전처럼 ‘한 번에 털어 넣는’ 데킬라가 아니다. 바와 레스토랑에서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실 때처럼 데킬라를 긴 다리가 달린 튤립 모양 잔으로 음미하는 문화가 서서히 자리를 잡는 중이다.

17일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8월까지 데킬라 수입량은 542톤을 기록했다. 이 추세라면 올해 데킬라 수입량은 800톤을 넘길 전망이다. 2020년과 비교해 2배 정도 늘었다. 양이 아닌 금액 역시 2021년 299만달러에서 지난해 647만달러로 116% 증가했다. 아직 시장 규모는 작지만 성장세가 가파르다.

특히 지난해부터 싱글몰트 위스키 열기가 한풀 꺾이자, 그 자리를 고가 프리미엄 데킬라가 채웠다. 데킬라 수입 중량 대비 금액은 팬데믹 이전 2019년 1톤당 5800달러 정도였다. 올해는 8800달러를 넘겼다. 5년 사이 51% 급상승했다.

주류 전문가들은 팬데믹 기간 국내 소비자들이 증류식 소주, 위스키 같은 증류주 경험을 집중적으로 쌓은 덕분에 데킬라처럼 생경한 주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데킬라는 알로에를 닮은 다육식물 용설란(아가베·agave)으로 만든 멕시코 증류주다.

우리나라에선 데킬라라는 이름을 두루 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멕시코 할리스코주(州) 데킬라시(市)와 인근 일부 도시에서 지역 특산 ‘파란 용설란(blue weber agave)’으로 만든 증류주만 이 이름을 쓸 수 있다.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지역에서 일반 용설란을 사용해 유사한 방식으로 만든 증류주는 메스칼(mezcal)이라 부른다.

팬데믹 시기만 해도 국내에서 데킬라는 인기 있는 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이 부족한 학생들이 빨리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했다.

특히 용설란 주정(酒精) 일부에 글리세린이나 향미증진제 같은 첨가제를 섞어 만든 저렴한 메스칼이 대학가에 퍼지면서 ‘데킬라를 마시면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선입견마저 커졌다.

하지만 엔데믹 이후 세계적으로 데킬라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주류 통계 기관 IWSR에 따르면 데킬라는 지난해 미국에서 보드카와 위스키를 제치고 증류주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유행에 밝고, 해외 경험이 쌓인 국내 소비자들도 이전보다 비싼 데킬라에 열광했다.

그래픽=정서희

국내 소비자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자, 올해 주요 주류 수입사는 새로운 데킬라 브랜드를 대거 들여왔다. 주로 원액이 빛을 보기까지 어지간한 위스키 못지않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프리미엄 데킬라들이다.

푸른 용설란 원액은 숙성을 할수록 깊은 단맛이 우러나온다. 데킬라 생산자들은 ‘무더운 멕시코에서 보내는 1년이 서늘한 스코틀랜드의 3년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10년 숙성한 데킬라는 주류 시장에서 30년을 숙성한 스카치위스키와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클라세 아줄 코리아는 16일 시판하는 데킬라 가운데 가장 비싼 ‘울트라’를 선보였다. 이 데킬라는 750ml 한 병에 600만원대다. 아가베 재배·수확부터 원액을 뽑아 병에 넣기까지 약 14년이 걸린다. 이 중 숙성 기간이 총 5년이다. 미국산 위스키를 넣었던 참나무통에서 3년, 스페인산 셰리와 아몬티야도 와인이 들었던 참나무통에서 2년을 더 묵힌다. 신세계백화점은 오는 18일부터 강남점에서 이 제품을 단독 판매한다.

디아지오코리아 역시 올해 고가 데킬라 브랜드 ‘돈 훌리오’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달 선보인 돈 훌리오 울티마 리제르바는 36개월 동안 미국 버번 위스키통과 포르투갈 마데이라 와인을 바른 참나무통에서 숙성해 만든다.

이들 두 브랜드와 함께 3대 프리미엄 데킬라 브랜드로 꼽히는 ‘1800′ 역시 올해 브랜드 최상위 등급 데킬라 밀레니오를 팝업 스토어에서 선보였다. 수입사 FJ코리아에 따르면 밀레니오는 총 3년 8개월 숙성 기간을 거친다.

데킬라는 멕시코 현지에서 보통 라임이나 소금을 곁들여 먹는다고 알려졌다. 고급 데킬라는 다르다. 전통적인 방법은 장기 숙성한 고급 테킬라가 가진 미묘한 풍미를 온전하게 느끼기 어렵다. 라임에서 나는 찌릿한 산미와 소금 짠맛은 복합미와 섬세한 여운을 깨뜨리기 쉽다.

이렇게 오래 숙성한 데킬라는 그 어느 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NEAT·니트)로 즐기는 편이 좋다. 음식과 함께 마신다면 단맛이나 향료가 들어가지 않은 탄산수를 곁들여 데킬라 하이볼로 마시길 전문가들은 권장했다.

비리 디아나 티노코 클라세 아줄 마스터 디스틸러는 “전 세계적으로 고급 테킬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약 10년 정도로 길지 않지만, 이 시장은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며 “클라세 아줄은 고급 와인이나 위스키와 같이 테킬라를 음미하는 문화를 한국에 퍼뜨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류 전문가들은 최근 3년 사이 위스키 시장이 급변한 것처럼 주류 소비자 취향이 다분화하는 추세가 이어지다 보면 국내 데킬라 시장이 자연스럽게 커질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한국주류종합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서 프리미엄 데킬라 소비자층은 아직 한정적이지만, 이미 포화 상태에 달한 와인이나 위스키 시장에 비하면 잠재력이 훨씬 큰 카테고리”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처음에는 청춘과 젊음, 클럽 문화로 데킬라를 기억하던 소비자들도 고급 데킬라를 경험하면 맛과 향에서 고유함을 간직한 제품에 자연스럽게 장기적인 소비를 늘릴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