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부와 상관없이 올해도 명절 최고가 선물 자리를 두고 유통 업계가 벌이는 자존심 싸움이 격해지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편의점 업계는 5억원짜리 위스키 선물을 지난 설에 이어 다시 꺼냈다. 편의점 채널은 백화점을 찾는 구매력 좋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매년 수억원대 선물을 재탕해 가며 내놓고 있다.

2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과 대형마트, 편의점 같은 주요 유통채널은 지난주를 기점으로 추석 맞이 선물 예약 판매에 돌입했다. 지난해 추석에는 롯데백화점이 내놓은 프랑스 최고급 와인 샤토 페트뤼스(Petrus) 18병 세트가 추석 최고가 선물 자리를 차지했다.

올해 추석에는 편의점 3사가 내놓은 5억원짜리 위스키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소비 경기가 움츠러드는 와중에도 1년여 만에 선물 최고가가 2억원 가까이 뛰었다.

편의점 CU와 GS25, 세븐일레븐이 동시에 내놓은 스코틀랜드 위스키 ‘윈저 다이아몬드 쥬빌리’ 가격은 5억원이다. 이 위스키는 올해 설에도 최고가 선물 자리를 차지한 바 있다. 설에는 CU에서만 이 상품을 취급했지만, 추석을 앞두고 편의점 3사가 일제히 이 위스키를 경쟁하듯 선물 카탈로그에 올렸다.

5억원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40밀리리터(ml) 위스키 한 잔에 2900만원 정도다. 스포이트 1ml에 20방울이 들어가는 점을 감안하면 1방울에 3만6000원이다.

이 위스키는 2009년 전 세계에 단 12병만 선보였다. 당시 판매가는 3억원이었다. 이 위스키를 유통한 디아지오에 따르면 위스키 제조 원가만 6만파운드에 달한다. 그 무렵 환율 기준으로 환산하면 1억5000만원이다. 이후 15년이 지나 3억원이었던 몸값은 5억원으로 뛰었다.

올해 추석 최고가 선물 자리를 차지한 스코틀랜드 위스키 ‘윈저 다이아몬드 쥬빌리'. /조선비즈DB

보통 초고가(超高價) 위스키는 30년 혹은 40년처럼 시간과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 내세운다. 그러나 이 위스키는 얼마나 오래 묵힌 원액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윈저 브랜드 수석 마스터 블렌더이자 위스키 업계 전설 더글러스 머레이가 숙성도와 상관없이 맛만 보고 고른 원액으로 만들었다.

마스터 블렌더는 다른 장소, 다른 참나무통에서 각각 숙성한 여러 위스키 원액을 섞어서 개성 있는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머레이는 디아지오에서만 51년을 일한 위스키 업계 산 증인이다. 그는 2022년 이 자리에서 은퇴했다. 매년 일정 수량 나오는 다른 제품과 달리 이 위스키는 12병이 다 팔리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위스키를 제조한 디아지오조차 “브랜드 정체성을 새롭게 정하는 과정에서 상징적인 차원에서 만든 제품”이라며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제품이 아니라 굳이 팔리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은 없다”고 했다.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제조사조차 판매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술이 편의점 3사 선물세트 가장 높은 자리에 일제히 오르는 모습을 경계했다.

명절을 앞두고 편의점 MD(상품기획자)들은 구하기 어려운 초고가 주류를 얼마나 확보하기 위해 몰두한다. 이렇게 어렵게 구해도 수억원대 초고가 위스키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오히려 팔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설에 선보였던 윈저 다이아몬드 쥬빌리는 이번 추석에도 고스란히 카탈로그에 실렸다.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이런 초고가 위스키는 애초부터 ‘안 팔려도 그만’인 상품에 가깝다. 편의점도 백화점 못지않게 그럴듯한 명절 선물을 판다는 점을 소비자에게 각인하기 위한 미끼 상품에 가깝다.

편의점 본사도 목돈이 드는 초고가 위스키를 직접 사들이지 않는다. 수입판매업체와 소비자 사이에서 중개·유통만 한다. 재고나 현금 흐름에 대한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한 판매 방법이다. 카탈로그를 본 소비자가 구매 의사를 밝히면 그때 편의점에서 주문을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 세계에 단 12병뿐인 위스키가 편의점 프랜차이즈 3개 사 카탈로그에 일제 실릴 수 있는 이유다.

일부 소비자들은 매년 명절 때마다 유통 채널이 반복해서 벌이는 ‘그들만의 경쟁’에 피로감을 호소했다.

한국소비자연맹 관계자는 “명절을 앞두고 편의점 같은 유통업체가 펼치는 고가 마케팅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킨다”며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도 통념을 넘어선 가격은 폭리로 비춰 부정적인 인식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사는 사람도 없고, 가격 경쟁력조차 없이 그저 고가 상품을 자랑하는 경쟁은 유통채널과 소비자 모두에게 무의미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