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139480)는 우리나라 와인시장 거인(巨人)이다. 몸집이 크고, 발자국도 거대하다.
2021년 이마트는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와인 매출 1500억원을 넘어섰다. 당시 국내 와인 소매시장은 1조원 규모였다. 점유율 15%로, 시중에 풀린 와인 여섯 병 가운데 한 병을 이마트가 판 셈이다.
이마트 트레이더스와 이마트24, 와인앤모어까지 포함하면 국내 소비자가 산 와인 4병 가운데 1병 꼴로 신세계(004170)그룹이 팔았을 거라고 와인업계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이마트는 2008년부터 매년 두 차례 큰 와인 장터를 열어 소비자를 끌어모았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와인을 팔기 어려운 시기였다. 뿌리 깊게 박힌 ‘와인은 비싸고 어려운 술’이라는 소비자 인식을 깨기도 쉽지 않았다.
이마트는 현지에 담당자를 직접 보냈다. 프랑스 보르도 도매상, 칠레 중부 와이너리와 직접 거래해 한꺼번에 수만 병, 많게는 수백만 병씩 와인을 들여왔다. 물량을 책임지는 대신 현지보다 낮은 공급가를 보장 받았다.
십수 년이 지나자 이마트 전체 주류 매출에서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와인 장터는 일주일 동안 와인 매출 100억원을 기록하며 입지를 굳혔다. 다른 경쟁사도 비슷한 대형 와인 판매 행사를 연거푸 시작했다.
명용진 이마트 주류 바이어는 지난 10여 년간 와인업계 최전선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이마트가 주도한 와인 대중화 대표작 대부분이 명 바이어를 거쳤다. 대표작은 4900원짜리 칠레 와인 도스 코파스다. 이 와인은 선보인 지 1년 만에 200만 병이 넘게 팔렸다. 이후 그의 손을 타고 2만원대 샴페인, 9900원짜리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이 등장했다.
그는 최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이전에 소비자가 와인을 굳이 외면할 수 밖에 없던 가장 큰 요인이 가격이었다”며 “이제 가격을 넘어 다른 요인을 어떻게 제거해야 소비자가 와인 시장에 들어올 수 있을지 고민할 시기”라고 말했다.
① “메가 트렌드가 사라진 자리에 밈만 남았다”
명 바이어는 2021년부터 2022년을 와인이 ‘메가 트렌드(거부할 수 없는 큰 흐름)’였던 시기라고 평가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와인을 보는 소비자 시선도 바뀌었다. 비싼 술, 어려운 술이라는 인식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지난해 사회관계망 트렌드 분석 서비스 소셜메트릭스에 따르면 와인 관련 연관어 가운데 94%는 긍정적인 단어였다. 좋다, 즐기다, 맛있다, 진심, 좋아하다 같은 말이 와인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와인 시장은 바람도 금세 빠졌다. 관세청 무역 통계에 따르면 와인 수입량은 2019년 4만3500톤에서 2021년 7만6600톤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지난해 5만6000톤으로 줄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전 2020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명 바이어는 “이전 2년 동안 빠르게 성장해서 이제 쉬어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며 “수입·유통사가 와인 재고를 아직도 많이 가지고 있고, 우후죽순 생겼던 와인 전문점(로드샵)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와인이 덤핑(정상가에 한참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파는 행위)으로 팔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와인은 유통 기한이 한정적인 식품이다. 보관도 까다롭다. 온도와 습도를 맞추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사라진다. 지난해 와인 시장 위축을 견디지 못한 수입사나 유통사, 전문점은 자금 확보를 위해 보관했던 와인을 대거 털어냈다. 일부 제품은 수입 원가보다 저렴하게 시장에 풀렸다.
이런 물량은 가격을 교란한다. 일부 소비자들은 대형마트처럼 믿을 만한 채널이 제시하는 가격조차 신뢰하지 않는다. 소비자가 떠난 시장 가격은 더 혼탁해진다. 악순환이다.
명 바이어는 “작년 초부터 와인 시장이 꺾일 조짐이 보였고, 작년 하반기 들어 정점에 올랐다”며 “올해까지 이런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와인이 2년 동안 차지했던 메가 트렌드 자리는 위스키가 가져갔다. 지금 소비자는 와인을 밈(meme·유행 콘텐츠)으로 소비한다. 유명 방송에 나오는 특정 와인, 연예인이 얽힌 와인만 주목한다. 이조차 잠시 판매량이 폭증했다가 곧 다시 줄어든다.
② 가격 경쟁력은 기본... 용량·포맷 차별화
지난해 와인 시장은 2020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다만 와인을 마셔본 소비자 경험은 그대로 남았다. 명 바이어는 이렇게 한번 와인 맛을 본 소비자가 다시 돌아올 시점을 기다렸다.
“올해 말, 아니면 내년에라도 다시 와인으로 소비자가 돌아올 겁니다. 이 시점에서 유통 채널이 준비해야 할 건 ‘소비자가 왜 와인을 안 마시느냐’에 대한 고민이에요. 이전에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서 안 마신다’ 했을 때, 가격 낮췄습니다. 그다음에 ‘어려워서 안 마십니다’ 하길래 전문가를 불러다 가장 좋은 선택지를 줬습니다.”
와인 인기가 오르던 시점에는 그에 맞춰 유통 채널이 띄운 결정적인 승부수가 존재했다. 명 바이어는 이를 ‘파괴적 변화’라고 불렀다.
파괴적 변화 1.0은 가격이었다. 이마트는 2017년 프랑스 보르도산 고급 와인 ‘뿌삐유’를 2만5800원에 선보였다. 프랑스 현지에서 20유로 안팎에 팔리던 와인이다. 당시 환율을 감안하면 2만8000원으로 현지가가 국내가보다 비쌌다. 2019년에는 4900원짜리 도스 코파스로 와인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파괴적 변화 2.0은 카테고리별 초저가였다. 품종과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을 해당 카테고리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선보였다. 2만원대 샴페인, 9000원대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품종 화이트 와인이 이렇게 나왔다. 이후에도 이마트는 ‘국민와인’, ‘톱픽와인’ 이름으로 여러 선택지를 놓고 망설이던 소비자에게 가격과 개성을 모두 잡은 명쾌한 답변을 제시했다.
명 바이어는 “와인 시장이 커지면서 소비자 입맛은 높아졌는데, 이 입맛에 만족하는 와인을 고르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저가는 유지하면서, 품질에서 뒤지지 않는 와인을 소개하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앞으로 추구할 파괴적 변화 3.0은 용량과 포맷 다변화다.
“소비자 상대로 ‘위스키는 잘 마시면서 와인은 왜 안 마시냐’고 물어보면 ‘위스키는 한 병 사서 몇 달은 마시는데 와인은 한 번에 다 비워야 하잖아요’라고 합니다. 이런 범용성 문제들은 용량을 줄여서 해결하면 됩니다. 지금 하프보틀(375ml 용량) 와인이 있지만, 가격이 750ml 한병 대비 반값이 아니에요. 절반보다 비싸요. 지금 세계적인 와인 제조사와 수입사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명 바이어는 “와인이 더 캐주얼(격식 없이)하게 일상생활 속에 젖어들 수 있도록 캔이나 팩, 컵 형태로 와인을 내놓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③ ‘어른들 놀이터’ 대형마트 주류 코너, 소비자 접점 강화
어느덧 편의점은 대형마트를 위협하는 와인·위스키 채널로 떠올랐다.
지난해 대형마트 와인 매출이 줄어드는 가운데, 편의점 와인 매출은 급증했다. 일상적으로 와인을 사는 소비자가 늘면서 대형마트보다 접근성이 좋은 편의점이 덕을 봤다.
세븐일레븐은 와인 매출이 50% 증가했다. GS25는 자체 애플리케이션(앱) 우리동네 GS25로 대형마트 못지않은 와인 구색을 갖췄다. CU도 자체 와인 브랜드(PB) ‘음’을 선보일 만큼 제품 공급력이 세졌다.
명 바이어는 편의점이 내세우는 물리적인 접근성 대신 대형마트만 선보일 수 있는 정서적인 가까움을 강조했다.
이마트는 지난해 5월 경기도 하남 스타필드 지하 1층에 선보인 ‘와인클럽’을 선보였다. 약 500평으로, 국내 최대 주류 전문점이다. 와인뿐 아니라 위스키·전통주를 포함해 주류 7000여 종을 판매한다. 판매가로 치면 총 70억원어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와인 전문 매장에 가서 한 세 시간을 넘게 와인을 구경하는 데 그 경험 자체가 너무 재밌었어요. 그래서 ‘와인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인클럽에 그냥 머무르면서 이 와인 저 와인 탐닉하고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싶어 그 콘셉트를 가져왔습니다.”
와인클럽에는 가로 길이 16미터에 달하는 거대 샴페인 셀러가 자리한다. 샴페인 360병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 상품 수는 850개로 한눈에 담기 어렵다. 와인을 배우거나, 와인 향을 맡아볼 수 있는 공간도 따로 준비했다.
그는 이 공간을 ‘술에 대한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공간’ 혹은 ‘어른들이 술을 가지고 노는 놀이터’라고 표현했다.
명 바이어는 “술, 특히 고급 주류처럼 상품 회전율이 낮은 상품은 빼곡하게 물건을 진열하는 편의점 채널보다 대형마트에서 브랜드 이미지와 경쟁력을 유지하기 좋다”며 “시장에서 외면받은 상품을 다시 눈에 보이는 곳으로 끌어내 새 삶을 불어넣기에도 대형마트가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