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부어라 마셔라’를 넘어 술을 음미(吟味)하는 시대다. 음미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내용을 새겨서 맛봄’이다. 새겨서 맛보는 소비자는 주류 시장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전처럼 전 국민이 소주와 맥주만 마시지 않는다. 매년 주목받는 주종이 바뀐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 빠르게 성장했던 와인은 지난해 내내 고전했다. 증류식 소주 시장 역시 성장세가 눈에 띄게 꺾였다. 싱글몰트 위스키마저 예년같지 않다. 그럼에도 매번 주류 시장을 비집고 나오는 술들이 존재한다. 조선비즈는 전문가들과 올해 국내와 해외 주류 시장을 이끌 새로운 술을 미리 살펴봤다.

그래픽=정서희

‘취하기보다 즐긴다.’

요즘 주류 문화는 취향에 맞는 술을 적당히 마시기를 미덕으로 삼는다. 소비자 데이터 조사 플랫폼 오픈서베이가 조사 ‘2023 주류 시장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여전히 우리나라는 맥주와 소주가 양분하는 시장이다. 출고가액을 기준으로 맥주와 소주 출고량이 전체 80%를 넘는다. 지난해 선호 주종 조사에서도 두 주류는 수위를 놓치지 않았다.

다만 주류 브랜드를 선택할 경우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가운데 맛과 함께 먹는 음식, 함께 마시는 사람 취향을 따지는 소비자 역시 급증했다.

이런 문화는 지난해 위스키와 증류식 소주, 청주, 하드셀처 시장 확대로 이어졌다. 지난해 위스키 수입량은 3만586톤을 기록했다. 해당 내역을 집계한 지난 2000년 이후 역대 최고 수치다. 바로 전해와 비교해도 14% 급증했다.

그러나 수입 금액은 뒷걸음질 쳤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를 보면 지난해 국내 위스키 수입액은 전년보다 2.7% 감소한 2억5957만 달러(약 3472억원)를 기록했다. 보통 성장하는 시장에서는 수입량과 수입액이 동시에 늘어난다. 일각에서는 수입액이 줄어든 점을 들어 ‘위스키 열기가 금새 식었다’고 평가했다.

열기는 식지 않았다. 다만 다른 곳으로 옮겨 붙었을 뿐이다.

① 위스키, 스코틀랜드·미국·일본 넘어 대만·인도·호주로

스코틀랜드는 위스키 종가(宗家)다. 기품 있는 영국풍 고급 술로 인정받으면서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끈다. 국내에서도 인지도 면에서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 그 뒤를 미국과 일본이 따른다.

여태 우리나라 위스키 시장은 오래 숙성한 고연산(高年産), 고가(高價) 위스키가 장악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주류업계를 달궜던 위스키 오픈런이 증거다. 유명 브랜드 제품은 웃돈을 얹어야 구할 수 있었다. 일본 위스키는 연중 원액 부족으로 가격을 연거푸 올렸다.

올해는 이들을 대신해 이른바 뉴월드(new world) 위스키가 입지를 넓히기 시작했다. 뉴월드 위스키는 전통적인 위스키 강국 스코틀랜드·미국·일본이 아닌 대만·인도·호주 같은 국가에서 생산한 위스키를 말한다.

와인업계에서 전통적인 와인 생산국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을 구대륙, 미국과 칠레처럼 비교적 늦게 양조를 시작한 국가를 신대륙이라 부르는 사례와 유사하다.

그래픽=정서희

지난해 대만산 싱글 몰트위스키 ‘카발란’을 수입·유통하는 골든블루인터내셔널은 카발란 면세점 판매량이 전년보다 7배 늘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인도와 호주, 독일, 덴마크, 멕시코산 위스키가 국내에 속속 등장했다. 인도 위스키 수입금액은 2021년 15만9000달러에서 2023년 50만달러로 3배 이상 늘었다. 호주 위스키 수입금액 역시 2021년 4000달러에서 2023년 13만9000달러로 35배 늘었다.

② ‘전통주에 탄산수를’... 한국형 하이볼 급부상

위스키에 탄산수와 얼음을 타서 마시는 술 ‘하이볼(highball)’은 지난해 젊은 여성 소비자를 중심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하이볼은 탄산수나 토닉워터에 섞어 가볍게 마시는 술이다. 대체로 고가 위스키를 사용하지 않는다. 뉴월드 위스키 소비 시장 확대와도 이어진다.

하이볼에 대해서는 정반대 평가가 상존한다. 사치스러운 주류 문화 대명사로 접근성이 낮았던 위스키를 대중화하고 새로운 소비 형태를 만들었다는 면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에 맞서 하이볼이 전통적인 위스키 문화를 퇴행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저렴한 위스키를 희석해 마시는 하이볼은 개성과 진한 향·맛을 내세우는 위스키 문화와 동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형 하이볼은 이런 부정적인 인식에 맞서 주류시장이 내놓은 대답이다. 국내 시장에서 하이볼은 증류주에 탄산수나 소다수를 섞은 술보다 넓은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통주 기반 하이볼, 고량주 하이볼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이볼은 가장 접근성 좋은 편의점 채널에서 수제 맥주를 대신할 주류로 떠올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편의점을 중심으로 새로운 레디투 드링크(RTD, Ready to Drink) 하이볼 제품 출시가 줄을 이었다. ‘처음처럼 솔의눈 하이볼’이나 ‘레모나 하이볼’처럼 익숙한 상품을 위트 있게 비튼 제품, 프랑스산 VSOP 코냑을 넣은 제품까지 나타났다.

③ 새로운 증류주 대표 주자 ‘데킬라’

위스키와 하이볼 인기는 곧 증류주 시장 전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데킬라는 알로에를 닮은 다육식물 용설란(아가베 ·agave)으로 만든 멕시코 증류주다.

우리나라에선 데킬라라는 이름으로 두루 쓰이지만, 멕시코 할리스코주(州) 데킬라시(市)와 인근 일부 도시에서 이 지역 특산 ‘파란 용설란(blue weber agave)’으로 만든 증류주에만 이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지역에서 일반 용설란으로 만든 증류주는 메스칼(mezcal)이라 부른다.

팬데믹 시기만 해도 국내에서 데킬라는 ‘인기 있는 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엔데믹 이후 해외에서 인기를 타고 국내 소비자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있는 주류 통계 기관 IWSR에 따르면 데킬라는 지난해 미국에서 보드카와 위스키를 제치고 증류주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국내 수입액 역시 2021년 299만달러에서 지난해 586만 달러로 약 95% 증가했다. 아직 시장 규모는 작지만 성장세가 가파르다.

최근 3년 사이 위스키 시장이 급변한 것처럼 주류 소비자 취향이 다분화하는 추세가 이어지다보면 국내 데킬라 시장도 일본처럼 자연스럽게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지금이 바닥이니 오히려 성장 잠재력이 풍부하다는 의미다.

한국주류종합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서 데킬라 소비자 층은 아직 한정적이지만 데킬라선라이즈 같은 유명 칵테일 주류 믹싱에도 자주 쓰이고,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데킬라 특유의 용설란 향을 이용해 하이볼에 넣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에는 고량주나 유자 리큐르를 넣은 믹싱주류가 편의점 같은 채널에서 팔리고 있으니 데킬라를 이용한 RTD 역시 또 다른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