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영업일: 24년 1월 23일(화) 22:00까지그동안 롯데리아 신촌로터리점을 이용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3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7번 출구. 계단을 곧장 올라오자 이마트가 바로 보였다. 한때는 그랜드마트였던 건물이다.
각 지역마다 ‘만남의 장소’가 존재한다. 보통 이런 건물들은 핵심 상권 한 가운데 자리해 자연스레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랜드마트가 그랬다. 그랜드마트는 1995년부터 신촌역 일대 젊은 층들에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다.
롯데리아 신촌로터리점은 2006년 그 바로 옆에 문을 열었다. ‘신촌로터리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로터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때 이 인근에는 동그랗게 자리 잡은 지하철 역 출구 여덟 곳을 둘러 싸고 대형 프랜차이즈가 즐비했다. 3번 출구에 맥도날드 신촌점, 2번 출구 투썸플레이스가 롯데리아와 터줏대감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이 일대는 신촌역 일대에서도 임대료가 가장 비싼 금싸라기 땅이다. 인근 공인중개사무소에 물어보니 “역세권이라 월세가 8000만원쯤 한다”고 답했다.
지난 2018년 맥도날드가 높은 월세를 견디지 못하고 가장 먼저 짐을 쌌다. 그리고 지난달 투썸플레이스가 뒤를 따랐다.
다음 차례는 롯데리아였다. 롯데리아를 운영하는 롯데GRS는 이날 이후 신촌로터리점을 폐점하기로 결정했다.
18년 영업의 마지막 날, 신촌로터리점을 직접 찾아가니 문 앞에는 ‘이날 밤 10시까지만 영업을 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추운 날씨 탓인지 매장 앞에는 발걸음이 뜸했다. 점심 무렵이었지만 매장 내부 키오스크 앞에도 줄 선 사람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널찍한 공간에 드문드문 앉아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공간은 한때 대학생들 미팅과 소개팅 뿐 아니라 과제·스터디 등을 하는 자리로 쓰였다.
인근 연세대와 서강대, 이화여대를 잇는 중심에 있고, 걸어서 3분 거리에는 큰 어학원도 여럿이라 젊은 층이 모이기 좋았다. 매장 뒤편에는 현대백화점(069960) 신촌점, 왼편에는 CGV 신촌아트레온점이 있어 데이트 약속 장소로도 많이 쓰였다.
이 날도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한 사람 가운데 대다수가 혼자서 책이나 태블릿을 펴놓고 무언가를 보면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날을 끝으로 이 곳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 보였다.
연세대 정문 앞 연세로부터 명물거리, 이화여대 정문 앞으로 이어지는 신촌·이대 상권은 2010년대 초반까지 서울 ‘황금 상권’ 가운데 하나였다. 강북에서는 명동, 종로와 어깨를 견주는 3대 상권으로 꼽혔다.
특히 젊은 층 소비 패턴을 파악하기 가장 좋은 지역으로 꼽혔다. 글로벌 식품 프랜차이즈나 대형 유통사가 운영하는 카페들은 일찍부터 신촌 일대에 눈독을 들였다. 이들은 마치 요즘 강남역 일대에 소비자 선호도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안테나 숍(antenna shop)을 여는 것처럼 신촌·이대부터 찾았다.
롯데쇼핑(023530)은 2004년 12월 국내 첫 크리스피 크림 도넛 매장이자 아시아 1호 매장을 신촌에 냈다. 그 다음에야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에 2호점을 열었다. 1호점 개장식에는 신동빈 당시 롯데그룹 부회장이 직접 참석해 테이프를 잘랐다.
스타벅스 1호점 역시 1999년 이화여대 정문에서 150여미터 떨어진 곳에 선보였다. 한때 중저가 화장품 시장을 주름잡았던 에이블씨앤씨 화장품 브랜드 미샤도 2002년 이대에 1호점을 내며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1990년 미스터피자가 시작한 곳도 이대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홍대와 신생 상권 연남동, 합정과 상수로 젊은 소비자들 발길이 옮겨갔다.
1992년 문을 연 신촌을 대표하는 록카페 우드스탁 문진웅 대표는 “신촌 지역 위상이 한참 높았을 때는 ‘신촌에서 가게를 하면 자식들 대학은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전국에서 여기로 장사를 하러 왔다”며 “어느 상권이든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신촌만의 매력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신촌을 떠났다”고 회상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소비 패턴이 바뀐 것도 타격이었다. 신촌과 이대 인근 상권에는 4~5평 남짓한 작은 의류·구두·액세서리 매장이 밀집해 있다. 이들 업장은 한때 밀리오레M과 예스APM 같은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중화권 관광객이 몰려들자 문전성시를 이뤘다.
중화권 관광객들은 사드(THAAD) 이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주력상품이었던 저렴한 옷이나 화장품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10년 넘게 신촌 상권에서는 상인들이 가게를 접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날 신촌역 일대를 둘러보니 지하철역에 인접한 역세권 상가에도 ‘임대’ 두 글자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통째로 비어있는 건물도 보였다. 신촌역사 밀리오레M은 대형 쇼핑몰 한 동 전체가 수년째 공실이라 아예 에스컬레이터 가동을 멈췄다.
신촌역에서 연세대 삼거리까지 이어지는 550m 길이 연세로(路) 일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아모레퍼시픽(090430) 화장품 브랜드 에뛰드하우스 신촌점은 불을 끈 채 매장을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놨다. 입구에는 영업 종료 라는 현수막만 나부꼈다.
한국부동산원 분기별 상업용부동산 임대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신촌·이대 지역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22%를 기록했다. 서울 시내 어느 주요 상권보다도 높은 수치다. 서울시 전체를 놓고 본 평균치 5.6%에 비해도 4배 가까이 높았다.
신촌 상인들은 ‘안정적인 대학상권’이라는 장점이 신촌만의 색깔을 살리는 데 오히려 독이 됐다고 분석했다.
2017년부터 소극장 신촌극장을 운영 중인 전진모 대표는 “이전 신촌 상권에서는 안정적으로 매출이 발생했기 때문에 홍대 앞이나 성수, 이태원처럼 다양한 콘셉트로 공간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며 “사람들이 이전처럼 공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거리’ 자체를 소비하기 시작하면서 신촌이 경쟁력을 잃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