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공룡 신세계(004170)와 식품업계 1위 CJ제일제당(097950)이 ‘대기업 무덤’이라 불렸던 파인다이닝 업계에서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는 오랫동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지적에도 파인다이닝에 투자를 강화했다. 그 결과 속속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2일 프랑스 정부가 주관하는 미식 가이드 ‘라 리스트(La liste) 2024′는 조선호텔앤리조트 소속 레스토랑 라망 시크레(L’Amant Secret)와 이타닉 가든(Eatanic Garden)을 나란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레스토랑으로 꼽았다.
라 리스트는 프랑스 정부가 주관해 세계 최고 레스토랑 1000곳을 발표하는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는 두 레스토랑을 포함해 총 36곳이 뽑혔다.
라망 시크레와 이타닉 가든을 이끄는 손종원 헤드 쉐프는 국내 최초로 ‘올해의 신인(New Talents of the Year)’ 부문에서 수상했다. 올해 상을 받은 6명 가운데 아시아 쉐프로는 유일하다.
라망 시크레와 이타닉 가든은 모두 미쉐린가이드 서울편에서 별 1개를 받았다. 미쉐린가이드는 라망 시크레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퀴진으로, 이타닉 가든은 이노베이티브 (innovative) 퀴진으로 구분한다.
조선호텔앤리조트 관계자는 “레스토랑 한 곳을 운영하던 쉐프가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별을 다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두 곳을 서로 다른 콘셉트로 동시에 운영해 별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며 “두 업장이 다른 곳과 차별화 할 수 있게 호텔 차원에서 조리팀과 식음(서비스)팀까지 강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세계 파인다이닝 사업이 처음부터 순풍을 타진 않았다. 신세계는 2018년 레스케이프 호텔 설립 당시 총지배인 자리에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죽마고우이자 유명 미식(美食) 블로거였던 김범수 씨를 앉혔다. 라망 시크레도 그의 작품이다.
그러나 김범수 당시 총지배인은 호텔 전체를 아우르는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 결국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범수 총지배인이 물러났지만, 호텔은 레스토랑을 닫거나 바꾸지 않았다.
이타닉 가든도 비슷하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 2021년 오픈과 함께 미국 뉴욕에서 이름을 알렸던 임현주 쉐프를 데리고 왔다. 임 쉐프는 1년을 못 채우고 레스토랑을 떠났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보통 파인다이닝에서는 쉐프가 곧 식당의 전부다. 쉐프가 바뀌면 이름은 물론, 콘셉트부터 식기 하나까지 다시 바꾸기 마련이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 폐업 대신 리뉴얼(renewal·새단장)을 택했다. 이번 라 리스트 등재는 끊임없는 투자로 얻은 결실이다.
브랜드 포지셔닝 전문가 김소형 데이비스앤컴퍼니 컨설턴트는 “신세계는 호텔과 백화점, 터미널처럼 파인다이닝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업 부문이 많다”며 “브랜딩 차원에서도 장기적으로 고급 식당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K-푸드 세계화’를 외치는 CJ제일제당은 파인다이닝에 대한 기대를 접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최근 우리나라 최고 모던 한식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모수(MOSU)를 정리했다.
서울 한남동에 자리잡은 모수는 현재 우리나라에 하나 남은 미쉐린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이다. 라망 시크레와 같은 2018년 문을 열었다.
당시 CJ제일제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름을 알린 안성재 쉐프에게 과감하게 투자해 이 레스토랑을 열었다. 모수는 이재현 CJ제일제당 회장이 강조했던 ‘프리미엄 한식 세계화’ 포문을 열 파인다이닝으로 기대를 모았다.
기대처럼 문을 연 지 3년 만에 2022 미쉐린가이드에서 2스타를 받았고, 지난해에는 3스타 자리에 올랐다. 미쉐린가이드 3스타는 ‘요리가 매우 훌륭해, 그 레스토랑 음식을 먹기 위해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이라는 의미다.
CJ 관계자 역시 지난해 10월 승급 당시 “능력 있는 쉐프를 발굴하고 오래 지원한 성과”라며 “수십년 영위해온 그룹 외식 사업이 시장에서 인정받은 사례”라고 밝혔다.
하지만 1년이 지나 CJ제일제당은 그 성과를 이어갈 수 없게 됐다.
아시아권 최대 라이프스타일 종합지 라이프스타일아시아의 제스로 강 시니어 에디터는 “모수는 홍콩과 싱가포르 미식가들 사이에서 가장 창의적인 한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 꼭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으로 통한다”며 “수익성을 추구하는 투자자와 철학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은 쉐프가 갈등을 빚는 사례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서도 많았다”고 말했다.
모수 이전에도 2020년 CJ제일제당은 같은 한남동에서 운영하던 일식 파인다이닝 스시 테츠카를 오픈 10개월 만에 접은 전례가 있다.
당시 CJ제일제당은 일본 긴자 유명 스시 전문점 큐베이에서 일했던 데츠카 요시히로 쉐프를 직접 영입해 그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 노력은 채 1년을 못 갔다.
2019년 3월에는 청담동 스시 우오를 닫았다. 우오는 5년 전 기준 점심 1인당 10만원, 저녁 20만원인 고가(高價) 스시 전문점이지만, CJ 즉석밥 햇반을 사용해 물의를 빚었다.
외식산업 전문가들은 CJ제일제당이 식품업계 1위 기업임에도 오래도록 파인다이닝 산업에 있어 좋은 연계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CJ그룹에서 파인다이닝 사업은 2010년대 초반 CJ엔시티가 맡았다. 이후 CJ그룹 외식전문 계열사 CJ푸드빌이 CJ엔시티를 합병하면서 자연스럽게 CJ푸드빌로 넘어갔다. CJ푸드빌이 자본잠식 상태에 빠지자 파인다이닝 사업은 2017년 다시 CJ제일제당이 가져갔다.
그룹 내 계열사들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숙련된 인력들은 다른 경쟁사로 빠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방향성이 사라졌다.
한식과 중식, 일식을 가리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외식사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프리미엄 한식 세계화라는 목표도 희미해졌다. 현재 CJ제일제당이 운영하는 고급식당 가운데 한식당은 소설한남 한 곳 뿐이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안성재 쉐프와 추구하는 방향이 서로 달라 재계약에 이르지 못했다”며 “앞으로도 재능이 있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쉐프들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한국 식문화 세계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