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韓食)이 전 세계 외식업계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있다.

K팝, K뷰티, K드라마 위상에 가려졌던 한식은 어느덧 한국 문화를 아우르는 근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먹는 경험은 듣고, 만지고, 보는 것보다 더 입체적인 경험이다. 어느 특정 감각만 사용하지 않고 미각과 시각, 촉각, 청각 모두 한번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세계인은 한식이 주는 새로운 경험에 열광한다. 전 세계에 한식 열풍이 불어닥친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정부와 외식업계 전문가들이 K-콘텐츠로 한식이 차지하는 영역과 위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은 지난 26일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삼청각에서 ‘맛의 깊이를 탐험하다(Adventurous Table)’라는 주제로 ‘2023 한식 컨퍼런스’를 진행했다. 이번 컨퍼런스에는 사전 참가 신청을 한 일반인을 포함해 세계 미식 트렌드를 주도하는 F&B 전문가와 쉐프, 외식 기업 대표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한식 발전 방안과 새로운 미래를 위한 브랜딩, 한식에 특화한 인재 양성법 같은 주제를 놓고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을 펼쳤다.

① ‘한식은 전통적이어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나라

첫 번째 세션에서 미식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요리 행사로 꼽히는 스페인 ‘마드리드 퓨전(Madrid Fusion)’ 위원장 호세 카를로스 카펠은 한식이 가진 잠재력에 주목했다.

현재 스페인, 특히 북부 산 세바스티안 일대를 중심으로 한 바스크 지방은 세계 미식 수도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전 세계 요리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카펠 위원장은 스페인 미식 관련 정책 수장으로, 무수히 많은 스페인 쉐프와 레스토랑을 마드리드 퓨전 행사를 통해 세계 무대에 소개하고 있다.

카펠은 “서울에 와서 며칠 동안 여러 식당을 방문해보니 다양한 양념과 재료를 100년 혹은 1000년 이상 이어온 전통적인 발효 기법으로 조리하고 있었다”며 “전통적인 방식을 원형대로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점에서 발전 잠재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이 잠재력이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모습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식 자체는 기본적으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상대하려면 지금까지 따르던 규칙을 조금 바꿔야 합니다.
서빙 방식이나 다른 재료와 조화를 만들어 낼 새 해석법이 필요합니다.”
호세 카를로스 카펠 마드리드 퓨전 위원장

카펠은 “마드리드 퓨전처럼 세계 최정상 쉐프와 식품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이 최신 조리법과 트렌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식을 알려야 한다”며 “다양한 국제 행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미식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세계 시장에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손민균

② ‘이런 음식을 대체 왜 하느냐’는 비난은 흘려 들어라

두 번째 세션에서는 홍콩 레스토랑 ‘베아’와 ‘윙’ 쉐프 비키 쳉이 미래를 바라보고 브랜딩을 하는 방법을 공유했다.

쳉 쉐프는 홍콩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다. 쉐프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음 배운 음식은 프랑스 요리였다. 그는 줄곧 프랑스 요리 전문가 밑에서만 일했다. 그러나 태어나고 자란 중국 광동음식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쳉 쉐프가 하는 베아(VEA)는 중식 재료를 프랑스 요리 기법으로 선보이는 차이니즈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그는 “8년 전 베아를 처음 열 때, 주변에서 일제히 ‘굳이 홍콩까지 가서 프랑스 요리 방식으로 중국 음식을 만들려 하냐’고 비난했다”며 “말린 해삼과 생선 부레, 말린 전복과 상어 지느러미는 좋은 요리 재료인데, 프랑스 요리에서는 이런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 새로운 길을 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쳉 쉐프가 좋아하던 이 재료는 지금 베아를 상징하는 요리로 재탄생했다. 그는 “요리사는 스승과 제자 식으로 교육하기 때문에 꼭 멘토가 있어야만 요리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며 “재료가 가진 전통과 역사를 이해하려 노력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③ 변호사·회계사까지 품에 안는 ‘한식 산업군’을 만들어라

마지막 세션에는 스페인 ‘바스크 조리학교’ 호세 마리 아이제가 이사장과 박정현 미국 뉴욕 아토믹스 쉐프가 한식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제가 이사장은 “글로벌 미식 인재 양성소 바스크 조리학교에서는 요리는 물론 호스피탈리티 산업, 미식 과학 같은 전방위적인 교육과 훈련을 제공한다”며 “다양한 조리 실습 교육 뿐 아니라 요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법과 연구를 병행해야 경쟁력 있는 미식 전문 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정현 쉐프는 “직접 레스토랑을 운영하다 보니 요리 말고도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며 “이런 부분을 감당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고 말했다

박정현 쉐프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인정받는 한국인 요리사다. 그는 2016년부터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 한복판에서 한식(韓食)을 요리했다. 지금처럼 한식이 널리 사랑받기 전이다. 그때까지 코리아타운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식은 그의 손을 거치면서 미국 주류 미식업계를 파고 들었다.

“미국에는 레스토랑 전문 회계사, 레스토랑 전문 마케터 같은 직업군이 잘 발달돼 있습니다.
레스토랑 인테리어 담당자가 따로 있고, 관련 법규를 봐주는 레스토랑 전문 변호사가 따로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쉐프가 직접 회계사도, 변호사도 만나야 하니 요리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박정현 아토믹스 쉐프

박 쉐프는 레스토랑을 그저 식당 하나로 여기지 말고, 외식업이라는 큰 생태계로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미식, 혹은 외식업 하면 쉐프만을 떠올리지만, 한식이 체계가 잘 잡힌 산업군으로 발돋움하려면 여러 전문가가 모여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임경숙 한식진흥원 이사장은 “이번 한식 컨퍼런스를 계기로 세계 무대에서 한식 인지도를 제고하고 한식이 지닌 가치를 확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한식이 글로벌 미식 브랜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 다양한 행사와 사업 활동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