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저녁 7시 서울 서초구 방배동 롯데마트의 야채·과일 코너. 20~30분 넘게 서성거려 봤지만 사과와 배를 둔 코너를 찾는 소비자는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가격을 확인하고 이내 발길을 돌리길 부지기수. 그 대신 소비자가 찾는 곳은 정가 대비 10~50% 가량 할인하는 못난이 과일·야채 코너였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롯데마트 전경. 사과 봉지가 켜켜이 쌓여있지만 가격을 확인한 소비자들이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정식 매대에서 판매하는 사과 6개는 1만1900원~1만2900원. 못난이 과일·야채 코너에서 판매하는 사과는 6개 기준 1만320원으로 정상가보다 20% 가량 싼 값이었다. 이날 마트를 찾은 주부 김승미(46)씨는 몇 번을 고민하다 결국 20% 할인된 사과 봉지를 내려놓았다.

김씨는 “상태가 안 좋은 과일과 야채라고 해도 체감적으로 50%는 오른 것 같다”면서 “비싸서 도무지 바구니에 담을 수 없다. 앞으로 추석이 걱정”이라고 했다.

추석 차례상에 못난이 과일을 올려놓을 수도 없고 가족들과도 나눠 먹을 만큼 구비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비싸면 사과나 배 대신 오렌지 등 다른 과일로 올리고 싶은 생각 뿐이란 것이다.

아직은 제철이 오지 않은 배값도 비싸긴 마찬가지였다. 배 4~5개의 가격은 1만6000원 수준. 이날 마트를 찾은 주부 김모씨(52)는 “이 정도면 그나마 고민할 만한 가격”이라면서 “추석 즈음이 되면 배값이 얼마나 뛸 지 걱정이 크다”고 했다.

정부가 서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물가 잡기에 총력전을 다하고 있지만 추석 차례상에 올릴 사과와 배값이 고공행진 하고 있다. 배추와 상추 등 야채가 금값이 된 것은 오랜 일이다. 이는 폭염과 장마에 태풍까지 겪으면서 열매가 여물기 전에 낙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채소와 과일을 10~50% 가량 할인해 판매하는 코너로만 소비자들이 몰리고 있었다./조선DB

장마와 폭염, 태풍은 여름철 단골 손님이지만 이번엔 과수 상승폭이 더 클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전까지는 우리나라가 태풍의 간접 영향권에 들면서 피해를 입은 정도였지만 이번에 불어닥친 태풍 ‘카눈’은 한반도에 직접 상륙했기 때문이다. 특히 과수와 채소 농작지가 몰려있는 경상도와 전라도 중심의 피해가 큰 상황이다.

16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태풍 ‘카눈’ 여파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사과와 배 등 과일이 낙과하면서 추석 제수상에 올릴 만한 품질 좋은 상품의 수량이 급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집중 호우로 과수 농가 피해는 전국적으로 여의도 면적(290㏊)의 10배가 넘는 3042헥타르(㏊)로 파악됐다. 이 중 여름 제철 과일인 복숭아(1418.8㏊)와 사과(537.9㏊)를 경작하는 과수원에 피해가 집중됐다.

이에 따라 사과 생산량은 전년 대비 19% 감소한 46만톤(t) 내외로 예상되고 있다. 장마와 폭염 여파로 안 그래도 과일 값이 고공비행을 했는데 태풍 여파로 값이 더 오를 것이란 뜻이다.

과일 가격은 이미 7월에도 눈에 띄게 올랐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사과값은 지난 6월 대비 17% 올랐고, 포도값은 31%, 복숭아는 15%, 토마토는 10.2% 올랐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에서 이달 10일 기준으로 집계한 과일 값도 전달 대비 비슷한 수준으로 올랐다. 사과(상품) 도매가격은 10㎏에 8만6225원으로 한 달 전(7만4872원) 대비 15.2% 올랐고, 1년 전(5만9720원)보다 44.4% 상승했다. 복숭아(11일 기준)도 4㎏에 3만3160원으로 1년 전(1만9559원) 대비 69.5% 올랐다.

문제는 9월 추석 전후의 과일 값이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산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8월 출하량은 생산량 감소와 추석 영향으로 전년 대비 20% 줄어들 것으로 보이고 9월에도 물량은 부족할 것이라고들 한다”면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사과는 최소 6%, 배는 11% 정도 값이 오를 것으로 보는데 말 그대로 최소 상승치고 추석 즈음이 되면 사과 한 알 사기가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오를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래픽=정서희

홈플러스 관계자는 “올해는 기후 불순의 영향이 유난히 클 것으로 보인다”면서 “과일 수확량을 감소할 것으로 보여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정 농가를 확대하고 사전 협의를 통해 물량 부족이 예상되는 부분은 추가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중”이라고 했다.

배추·상추·파 등 채소값은 금값이 된 지 오래다. 올해 김장김치는 꿈도 못 꿀 것이란 이야기가 벌써부터 흘러나오는 이유다.

aT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지난 11일 배추(상품) 도매가격은 10kg에 2만5760원으로 한 달 전보다 160.7% 올랐다. 1년 전과 비교하면 35% 오른 셈이다. 무 도매가격은 20kg에 2만9320원으로 한 달 전보다 127.3% 올랐다. 대파 도매가격은 1kg에 3250원으로, 한 달 전과 비교하면 56.6% 상승했다.

김장 대신 포장김치를 사겠다는 응답도 늘고 있다. 김장김치는 작년 9월 태풍 힌지노 영향으로 일제히 값을 올린 이후 올해는 가격 인상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과천시에 거주하는 김미영씨(40)는 “올해 배추 김치가 이 정도로 오르면 집에서 담궈 먹는 것이 더 비싼 것 같다”면서 “이 정도면 부담스러워서 김장은 언감생심”이라고 했다.

식품업계는 정부가 9월 추석 민심을 잡기 위해 물가 상승 분위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제동을 가하고 있지만 이대로면 추석 밥상머리 물가는 잡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마트 식품 MD는 “과수나 야채류는 어쨌거나 수요와 공급이 맞아야 하는데 이번 태풍으로 공급이 현저히 줄어들수밖에 없고 특히나 추석 차례상에 오를 만한 품질 좋은 과수는 물량이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물가가 너무 올랐다’는 말이 추석 연휴 기간에 오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