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와인 모두 생활 방식과 취향, 감성을 반영한다.
와인은 패션 브랜드가 독창성과 전통, 품질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전 세계 패션업계를 주무르는 거물들이 최근 와인사업에 손을 뻗치고 있다.

이들은 패션과 와인이 서로 만나는 접점에 주목한다. 오래된 와인 브랜드에는 패션업계에서 쌓은 젊고 신선한 이미지를 접목한다.

반대로 수십 년간 명망 높은 패션 브랜드를 경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새 와인을 만들기도 한다.

24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호주 와이너리 펜폴즈(Penfolds)는 지난 13일 프랑스 고가 패션 하우스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니고(나가오 토모아키)를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로 영입했다.

니고는 현재 세계 패션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가운데 한명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트리트 패션계에서 가히 대부라 불린다.

1993년 그가 선보인 ‘어 베싱 에이프’는 무수한 연예인과 스트리트 패션 애호가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루이비통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라 불리는 버질 아블로가 가장 먼저 협업한 디자이너도 니고다. 세계 최대 패션그룹 LVMH는 니고의 인기가 매년 치솟자 2021년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겐조 브랜드를 맡기고 있다.

펜폴즈는 1844년 문을 연 호주 국보급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그란지는 2001년 호주 국가 문화재로 등재됐다.

니고는 앞으로 펜폴즈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로 고전적인 제품군에 한정했던 브랜드 역량을 다양한 소비자 층으로 넓히는 계획을 맡는다. 니고 본인 브랜드를 이용해,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독자적인 와인도 내놨다.

일본 주류전문 유통사 후지이트레이딩의 이케다 쇼고 주류 부문 마케팅 담당자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니고는 일본에서 이미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 차원을 넘어 음악과 예술, 산업계를 넘나드는 아티스트”라며 “니고와 어떻게든 협업을 하거나 광고 모델로 써보려 한 일본 주류 브랜드가 많지만, 주류업계 분위기가 보수적이고 개런티(몸값)가 높아 무산된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패션 브랜드에서 CD는 단순히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브랜드 콘셉트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매분기 쇼와 광고 이미지를 총감독한다. 개인 역량에 따라 패션 디자인 영역을 벗어나 직접 브랜드를 상징하기도 한다.

와인업계에서는 그동안 이런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포도라는 농산물을 기반으로 공산품인 술을 만들어내는 산업 특성 상 농업 혹은 제조업적인 성향이 강했다.

더러 와인 양조를 책임지는 총괄 양조가나, 귀족 가문 출신 주인장이 주목받는 경우는 있었다. 다만 크리에이티브 파트너 같은 공식 직함을 가지고, 브랜드 아이콘(상징)으로 올라서는 경우는 없었다.

최근에는 유명 브랜드를 이끄는 경영인이 직접 와이너리 총책임자로 나섰다.

‘캐시미어의 제왕’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 창립자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지난해 11월 본인이 직접 만든 첫 와인을 선보였다.

이 브랜드는 한벌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고품질 친환경 니트와 재킷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와인은 브랜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지속가능성이라는 점을 소비자에게 증명하는 존재다.

쿠치넬리 창립자는 지난해 11월 본인 와인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와인을 처음 마셨을 때 나는 갑자기 내 안에서 대지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느꼈다”며 “이 브랜드를 지금 이 모습으로 이끈 욕망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이켜보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 회장 페루치오 페라가모의 아들 살바토레 페라가모도 가업 대신 와인 사업 부문 최고 경영자(CEO)로 일하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와의 인터뷰에서 “브랜드 창립자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로 어떻게 하면 가족에 가장 크게 공헌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가 와이너리 관리였다”며 “특별하고 진실된 와인을 만들어내는 일은 좋은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와인업계 전문가들은 이런 패션거물들이 와인업계로 다시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촉매가 되길 기대했다.

전통적인 와인 소비국이었던 유럽과 북미권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와인 소비가 꾸준히 줄고 있어서다.

호주 애들레이드대 와인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4국에서 1인당 연평균 와인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때는 1920년대로 119.9리터였다. 하지만 이후 빠르게 줄어들어 2010~2016년은 33.2리터에 그쳤다.

브랜드 포지셔닝 전문가 김소형 데이비스앤컴퍼니 컨설턴트는 “패션업계처럼 주류업계도 수천수만개 브랜드가 차별화에 몰두하는 시장”이라며 “경기 침체 여부와 상관없이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많이 팔리는 것처럼 유명 패션 관계자가 개입한 와인 역시 기존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와인시장 추이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