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라면이지, 산해진미 넣는다고 보양식이 되겠어?”

일반 라면보다 가격이 비싼 대신 맛과 품질이 좋다는 고급 라면이 또 한번 난감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지난 18일 “지난해 9~10월 (라면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으로 내렸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라면 값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입니다.

장관 발언이 나오자마자 라면회사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했습니다. 19일 삼양라면과 불닭볶음면으로 유명한 삼양식품(003230)은 전날보다 8900원(7.79%) 하락한 10만5400원에 장을 마쳤습니다.

신라면으로 유명한 농심(004370)은 6.05% 하락한 41만1500원에, 진라면을 만드는 오뚜기(007310)는 2.94% 내린 42만8500원에 거래를 마감했습니다.

2011년 출시 4개월 만에 국내 생산을 중단했던 신라면 블랙.

이는 12년 전인 2011년 당시 분위기와도 비슷합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도 서민 물가 급등을 이유로 서민식품의 대명사격인 라면가격 인하를 도모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식품업체들은 라면가격을 20~50원 가량 내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식품업체들이 야심차게 내놨던 고급 라면입니다. 일반 라면은 2011년 정부 압박에 가격을 내렸다가 시간이 좀 지나자 슬그머니 다시 가격을 올렸지만, 고급 라면의 경우 국내 시장에서 아예 생산이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농심의 ‘신라면 블랙’입니다. 2011년 4월 농심은 ‘우골보양식사’라는 광고 문구와 함께 신라면 블랙을 출시했습니다. 라면값은 개당 1600원으로 기존 신라면 가격 대비 2.3배나 됐습니다.

당시 평가는 좋지 못했습니다. 일반 라면보다야 깊고 구수한 맛이 나지만 우골분말스프를 추가하고 건더기가 조금 늘어난 것으로 보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과대광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일반 라면값을 올리려는 꼼수라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고급 라면 출시로 라면에 대한 가격 저항선을 없애고 서민 라면 값도 올려 객단가를 상향하려는 전략이라는 뜻입니다.

신라면 블랙은 사회 분위기에 소비자 외면까지 겹치면서 출시 4개월만에 결국 국내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해외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2012년 9월 1년2개월만에 생산을 재개했지만 시기를 잘못 타고난 탓에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셈입니다.

지난 2021년 하림(136480)이 야심차게 내놓은 ‘더미식 장인라면’은 당시 신라면 블랙과 두 가지 면에서 같습니다.

먼저 기대만큼 소비자 호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고, 물가 상승에 대한 부담이 커진 시기라는 점입니다.

지난 2021년 ‘더미식 장인라면’을 소개하는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하림 제공

시장조사업체 닐슨아이큐코리아에 따르면 하림의 더미식 장인라면은 지난해 라면 매출 상위 20위에 들지 못했습니다. 식품업계에선 더미식 장인라면의 실제 점유율을 1% 미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미식 장인라면의 한 봉지 가격은 2200원. 신라면이나 진라면의 가격 대비 2~3배 됩니다. 더미식의 부진 등을 이유로 하림산업의 영업손실은 지난해 867억원을 기록했습니다.

그래픽 = 손민균

하지만 하림그룹은 더미식 브랜드를 포기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미 라면사업을 위해 전북 익산에 하림푸드 콤플렉스를 지으면서 5200억원이나 투자했고 무엇보다 이 사업에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이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 회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라면을 직접 끓이면서 “7년전 쯤 막내 딸이 시중에 파는 라면을 먹은 후 아토피 증상을 겪었다. 그때부터 인공 조미료를 뺀 건강한 라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제품 개발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안타깝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통상 출시 이후 단기간에 시장 점유율이 어느 정도 나오지 않으면 단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시대적인 분위기 탓에 라면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려줄 고급 라면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식품 애호가들 사이에선 아쉬운 점입니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라면이라는 음식은 밥 하기 싫을 때, 한 끼 적당히 넘길 때 먹는 것으로 그 자체로 고급화된 이미지를 가져가기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간편식도 맛과 품질을 고급화하겠다는 공략법은 니치마켓을 공략한다는 점에서 유효할 수 있지만 시기마저 좋지 않아 신라면 블랙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인플레이션 시대에 서민 음식 라면보다 더 위치가 애매해진 고급 라면. 앞으로 펼쳐질 가시밭길을 무사히 헤쳐나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