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와인을 만들 때 빠질 수 없는 요소를 꼽으라면 보통 천(天)·지(地)·인(人)을 고른다.
천은 하늘, 즉 기후를 말한다. 지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 인은 그 포도로 와인을 만드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렇게 세 요소가 조화를 이뤄야 어느 한 군데 모나지 않은 균형감 좋은 와인이 나올 수 있다.
사람은 포도를 키우고, 땅의 포도를 뿌리 내리게 한다면 기후는 포도를 무르익게 만든다. 여느 농작물처럼 포도 역시 기후 조건에 민감하다. 강수량이나 일조량 같은 기본적인 기후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만 포도알이 충분히 성숙한다.
실력있는 양조가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은 햇빛과 비만 보지 않는다.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을 함께 읽는다.
흙이나 태양, 구름과 달리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포도를 지키는 보호자 같은 존재다.
아무리 양지 바른 포도 밭일지라도 햇볕이 지나치게 내리쬐면 포도가 너무 익거나, 심지어 타들어 간다. 포도 밭 주위에서 부는 바람은 낮 동안 뜨거운 태양빛에 시달린 포도 알맹이들을 식혀준다.
반대로 밤 중에는 지면이 품은 잔열을 순환시켜 포도 밭에 찬 공기가 내려 앉지 못하도록 돕는다. 포도나무에 서리가 너무 자주 맺히면 그 해는 포도 밭 일대 나무 전체가 곰팡이 피해를 입기 쉽다. 적절한 바람은 서리로 맺힌 습기를 제거해 흉작을 막아 준다. 낮과 밤 온도 차이가 심한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 와인 생산자들은 이를 위해 이른 새벽 일부러 헬리콥터를 포도 밭에 띄워 인위적으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 밭을 상당 수가 바람이 잘 드는 고지대나 계곡, 혹은 강한 해양성 계절풍이 부는 해안가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산지 이름에 밸리(valley)나 코스트(coast)가 들어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칠레 유명산지 아콩카구아(Aconcagua) 밸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지역은 다른 칠레산 레드 와인 생산지보다 다소 북쪽에 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를 기준으로 몬테스 알파 주 품종을 키우는 쿠리코나 콜차구아 밸리, 돈 멜초와 같은 프리미엄 와인이 나오는 푸엔테 알토 지역은 남쪽에 속한다.
반면 아콩카구아 밸리는 산티아고에서 100여킬로미터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만큼 칠레 주요 레드 와인 산지 가운데 평균 온도가 낮고, 바람도 서늘한 편이다.
19세기 말, 칠레에 한창 와이너리 붐이 일어날 때 다른 와인 생산자들이 바람이 거세고 추운 산티아고 북쪽을 외면했다.
그러나 비냐 에라주리즈(Errazuriz) 창립자 돈 막시미아노 에라주리즈는 반대로 그 바람에 주목했다. 그는 칠레 와인 생산자 가운데 최초로 프랑스에서 직접 포도 품종을 가져와 칠레 땅에 옮겨 심은 인물이다.
돈 막시미아노가 1870년 이 곳에 와이너리를 세우고, 150여년이 지난 현재 아콩카구아는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지난 200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테이스팅’에서 아콩카구아 밸리산(産) 와인들은 프랑스산 최고급 와인에 해당하는 샤토 마고, 샤토 페트뤼스, 샤토 라피트 로칠드를 모조리 앞섰다. 당시 언론들은 이 결과를 대서특필하면서 1976년 ‘파리의 심판’으로 미국산 고급 와인이 세계 시장에 등장한 것처럼 이제 칠레 고급 와인의 시대가 왔다고 평가했다.
아르볼레다(Viña Arboleda)는 현재 비냐 에라주리즈를 이끄는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이 가장 투명하게 아콩카구아 지역 자연 환경을 담아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와이너리다. 그는 아콩카구아에 새 숨결을 불어넣은 돈 막시미아노의 5대손이다.
에두아르도는 앞서 1991년 세냐, 1999년 비녜도 채드윅 처럼 1병에 200달러가 넘는 고급 칠레 와인을 전 세계 시장에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더 비싼 초고급(ultra premium) 와인을 만들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로하고, 개인 벤처(personal venture) 형태로 네 딸들과 이곳 아르볼레다에 둥지를 틀었다.
아르볼레다 와인들은 가격적인 측면에서 일상적으로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국내에서도 판매처와 품종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통 750밀리리터(ml) 한 병에 3만원대 수준이다. 수입사는 에노테카코리아다.
아르볼레다는 딸들과 함께하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다.그래서 내게는 다른 그 어떤 사안보다 더 특별하다.1990년대 칠레 와인이 가야할 길을 고급화라고 생각했다.지금은 환경친화적 생산방식,지역 사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에두아르도 채드윅, 2021
아르볼레다는 생산량을 중시하는 여느 대형 와이너리와 달리, 설립 초기부터 지속 가능성을 최우선에 뒀다. 아르볼레다라는 이름부터 스페인어로 큰 나무 군락을 의미한다. 에두아르도 말처럼 아르볼레다는 칠레에서 최초로 지속 가능성 코드(National Code of Sustainability) 인증을 받았다.
이 와이너리는 전체 면적 가운데 4분의 1 이하만 포도밭으로 사용한다. 나머지는 동물이나 곤충, 미생물들이 그대로 살도록 놔둔다.
이렇게 넓게 내버려 둔 미(未)경작지는 자연스럽게 생태 통로(natural corridor)로 자리를 잡는다. 동물들이 오가며 내놓는 분뇨는 거름이 되고, 포도밭 이곳저곳에 자란 잡초와 허브가 뿜는 향기는 농약 대신 병충해를 막아준다.
아르볼레다가 만드는 와인 가운데 가장 좋은 와인에 속하는 ‘브리자(brisa)’는 스페인어로 ‘해안에 부는 바람’이나 ‘산들바람’이라는 뜻이다.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최고의 와인에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은 이 와이너리가 얼마나 바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증명한다.
이 와인은 태평양 해안에서 37킬로미터 떨어진 라스 베르티엔테스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다. 십리 밖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지중해성 기후에 시달리는 포도 알맹이를 식혀줘 와인에서 상쾌한 맛이 나게끔 도와준다.
하이메 리베라 구즈만 비냐도 채드윅 그룹 동북아 수출 담당자는 “브리자는 매년 만드는 와인이 아니라, 와인 메이커가 생각하기에 포도의 수준이 라스 베르티엔테스 포도밭을 충분히 반영할 정도로 무르 익었다는 판단이 드는 해에만 만드는 한정 생산 와인”이라며 “시라와 그르나슈를 중심으로 카베르네 소비뇽과 말벡, 무드베드르 같은 포도 품종을 한꺼번에 섞는 방식은 칠레 전역을 살펴봐도 브리자가 유일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