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에 처음 쓰여진 옥스퍼드 잠언 사전에는 ‘극과 극은 서로 만난다’는 표현이 적혀있다. 이 서양 속담 속에서 두 극단(Extreme)은 복수로 쓰이다, 이내 하나로 합쳐진다.

서로 완전히 다른 편에 서있던 대상이 알고 보니 비슷하거나, 때로는 일치한다는 진리가 이 한 문장 속에 담겼다.

그림 같은 예술, 와인을 포함한 술(酒)에도 이 격언은 그대로 쓰인다. 그림과 와인은 서로 너무나 다른 분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림과 와인 모두 ‘창조와 창의성’을 토대로 한다. 화가들이 물감을 도구 삼듯, 양조가들은 그 해 자연 환경에서 받은 영감을 포도로 표현한다.

반대로 일부 화가들은 아예 물감 대신 포도주를 사용하기도 한다. 세르비아의 산야 얀코비치나 벨기에의 폴 클로드 배빙어 같은 화가는 실제 와인으로 그림을 그린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은은하고 밝은 수채화를, 레드 와인으로는 낙엽이 지는 깊은 가을 느낌을 살리는 식이다.

널리 알려진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일부는 와인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파리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내 위장이 너무 약해진 것도 그곳에서
싸구려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지.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5월 1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이처럼 술과 예술을 공감각적으로 함께 즐기려는 새로운 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싹을 틔우고 있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면서 젊은 와인 소비자와 미술 애호가 사이 교집합 역시 매년 두터워지는 추세다. 이들은 단순히 향락적인 음주 문화를 지양한다. 동시에 미술 작품을 여러 감각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자연히 미술 작품과 와인을 한 자리에서 보고, 마시는 데 거리낌이 없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을지로 아트코너H. 퇴근길에 나선 직장인들 발걸음이 분주한 가운데, 이 조용한 갤러리 이층에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이들이 앉은 넓은 테이블에는 스무개가 넘는 와인 잔과 간단한 먹을 거리가 놓였다. 테이블 주변으로는 액자 대신 긴 걸개에 캔버스 채 그대로 전시한 미술 작품이 자연스럽게 너풀거렸다.

이윽고 와인 설명을 맡은 딜리셔스보틀샵앤바 대표 이소리 소믈리에가 와인 겉면을 가린 채 돌아가면서 와인 두 잔을 동시에 따랐다.

“오늘 같이 알아볼 피노누아(Pinot Noir) 품종 와인은 맛도 중요하지만, 향으로 먼저 즐기는 와인입니다. 처음 따라 드린 와인과 두 번째로 따라 드린 와인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와인이니 같이 비교하면서 향을 맡아 보세요.”

이날 열린 ‘봄날의 와인살롱’은 청년예술가를 후원하는 햇빛담요재단이 주기적으로 여는 문화예술활동이다. 햇빛담요재단은 우리나라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생소한 국가들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고, 문화예술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이날 와인과 함께한 작품들 역시 발트3국에 속하는 리투아니아 신진 작가 이바 트린쿠나이테(leva Trinkunaite)가 그렸다.

이 작가는 작품에 여러 색깔을 쓰지 않는다. 비슷한 색을 사용하되, 명암을 달리하거나 붓을 세심히 사용해 입체적인 질감을 표현한다. 여러 품종을 섞지 않고 오롯이 한 포도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드는 피노누아와 닮았다. 이날 강좌에 나온 모든 와인은 피노누아 100%로 만들었다.

그래픽=손민균

미술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대개 보는 즉시 결정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처음 눈길이 간 그 시점에 느끼는 감각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강렬한 첫 모금에서 떠오른 인상은 좀처럼 뒤집히지 않는다. 이날 첫 와인을 머금자 풍성한 과실향이 입 안 가득히 몰려들었다. 잘 익은 딸기를 한 움큼 문 것만 같은 단 맛이 함께 따라왔다. 두번째 와인에서는 촉촉하게 물에 젖은 흙냄새가 새초롬한 꽃 향기와 함께 서서히 다가왔다.

확연하게 향이 다른 두 와인만큼 참가자들의 의견 역시 반으로 갈렸다. 절반은 첫 와인을, 나머지는 두번째 와인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첫번째 와인은 필드 레코딩스라는 미국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원더월’이라는 와인이다. 이 와인은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사이에 자리잡은 에드나(Edna) 밸리라는 산지에서 만든다.

이 지역은 앞으로는 태평양, 뒤로는 캐스케이드 산맥을 끼고 있어 일년 내내 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빛이 든다. 그 덕분에 충분히 잘 익은 포도로 과실 풍미가 살아있는 와인을 만들기 좋다.

따뜻한 햇빛이라는 열쇳말은 곧 참가자들 뒷편에 걸린 ‘잇츠 게팅 핫 인 히어(It’s getting hot in here)’라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에는 작열하는 태양열 사이에 두 마리 개가 몸을 포개고 앉아 있다. 그 뒤편으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 앞에 작은 물가가 옅보인다. 마냥 덥기만 하다면 이 지역에서 키우는 포도는 전부 타버리겠지만, 그림 속 봉우리 사이로 미세하게 바람이 부는 듯 호수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이바 트린쿠나이테 작가는 본인 작품을 그리면서 와인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와인을 마시면서 함께 감상한 그의 작품은 감춰진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오늘 주제인 피노누아라는 포도 품종은 병충해에도 약하고, 포도껍질도 얇아서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품종“이라며 “그래도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완성품이 나오면 슈퍼스타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모습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고 말했다.

양조가의 역량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태어난 완성도 높은 피노누아 품종 와인은 그 화려한 모습만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는 의미다. 참가자들 역시 와인 혹은 그림에 대한 지식에 상관없이 본인이 느낀 바를 서슴지 않고 드러냈다.

여러 산골짜기에서 흘러든 작은 물줄기가 모여 호수를 이룬 장면을 묘사한 ‘더 레이크(The lake)’는 이번 전시에서 눈 여겨볼 만한 작가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붉은 색이 주(主)를 이루는 여러 작품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파란 색은 신비로움을 넘어 낯설음에서 오는 생동감까지 선사했다.

참가자들은 이 그림을 두고 ‘호주의 서늘한 와인산지 야라밸리에서 만든 와인을 마실 때 호수 그림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 ‘동물들 역시 지쳤을 때 호수를 찾는 것처럼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차분함이 편안하게 와인을 즐기는 이 자리와 잘 어울렸다‘고 입을 모았다.

최태호 햇빛담요재단 아트 디렉터는 “전시를 기획하는 시점에서는 분명히 작가나 큐레이터가 의도하는 부분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람객들은 작품을 재밌게 보고 각자 생각할 거리를 찾아가면 된다”며 “미술이나 와인은 보통 많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시도가 어려움 대신 즐거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