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맥주’로 잘 알려진 국내 1세대 수제맥주 기업 카브루가 사업 조정에 나섰다. 잇따라 캔맥주 신공장을 지으며 생산량 확대에 나섰지만, 최근 공장까지 매각하며 생산 축소로 돌아섰다. 편의점 냉장고를 가득 채웠던 캔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세가 확 꺽이면서다.
12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카브루는 지난해 12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수제맥주 생산 공장 ‘상색 브루어리’를 매각했다. 상색 브루어리는 연 600만캔의 캔 수제맥주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자 카브루의 본사로도 사용됐지만, 23억원에 처분됐다. 2018년 완공 4년 만이다.
이로써 카브루에는 케그(통) 생맥주를 생산하는 ‘상천 브루어리’와 2021년 완공한 캔 수제맥주 신공장 ‘비전 브루어리’ 2곳만 남게 됐다. 카브루는 비전 브루어리 완공 당시 “업계 최고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밝혔는데, 상색 브루어리 매각으로 틀린 말이 됐다.
2000년 옛 카파인터내셔널에서 출발한 카브루는 수제맥주의 한 종류인 ‘페일 에일’을 국내에 처음 선보인 국내 수제맥주 1세대로 꼽힌다. 2015년 ‘천하장사’로 유명한 진주햄이 카브루를 인수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진주햄의 카브루 지분은 지난해 기준 34.4%다.
카브루는 진주햄이 최대주주로 오른 후 맥주 전문점에 생맥주 케그를 공급하던 것을 넘어 캔 수제맥주 가정용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진주햄 대표인 박정진 대표가 직접 카브루 수장에 올라 생산 설비 확장은 물론 수제맥주 판매 채널 확장을 이끈 것으로 알려졌다.
카브루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카브루의 캔 수제맥주 생산 능력은 연 3200만캔(500㎖) 수준이다. 상색 브루어리 처분으로 연 최대 3800만캔에서 16%가량 생산 능력이 줄었다. 카브루 측은 “상색 브루어리를 매각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운영 효율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수제맥주의 인기가 시든 게 카브루의 맥주 생산 공장 매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2020년 ‘곰표맥주’의 성공 이후 치약, 껌, 구두약까지 각종 브랜드 협업한 수제맥주는 한때 편의점 기준 200%대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60%로 성장세가 완전히 꺾였다.
BGF리테일(282330)이 운영하는 편의점 CU에 따르면 수제맥주 매출 신장률은 2019년 220%에서 2020년 489%로 뛰었다. 2020년은 곰표맥주가 처음 등장한 해다. 이후 2021년 신장률은 255%로 3년 연속 신장률 200%를 넘어선 바 있다.
지나친 협업이 독이 됐다는 분석이다. 무분별한 신제품 등장, 과다한 마케팅으로 인한 소비자 피로도, 또 협업에 따른 가격 경쟁력 상실까지 나타났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수제맥주 고유의 다양한 맛과 향은 사라졌고, 소비자 피로만 커졌다”고 말했다.
카브루도 자체 수제맥주 구미호 맥주 외에 협업 맥주를 내는 데 주력했다. 식품기업 진주햄의 소시지 천하장사를 사용한 ‘천하장사 맥주’, 배달 애플리케이션 배달의민족과 손잡고 선보인 ‘굿 기분 좋은 맥주’, SSG랜더스 ‘슈퍼스타즈 페일 에일’이 모두 카브루의 제품이다.
시장에선 실적 악화도 카브루의 이번 공장 매각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카브루는 2016년 상천 브루어리, 2018년 상색 브루어리, 2021년 비전 브루어리를 준공하면서 약 180억원을 썼다. 돈을 들어 생산 설비를 늘렸지만, 2020년 5억원이었던 적자는 2021년 12억으로 지난해 17억원으로 늘었다.
맥주업계 한 관계자는 “협업 수제맥주가 쏟아지면서 수제맥주 회사도 크게 성장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면서 “협업 맥주는 수제맥주 제조사가 맥주 생산을 늘리기 위한 노력일 뿐 협업사와의 수익배분, 판매 수수료를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수제맥주 기업들의 사업구조 재편이 올해부터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시장 성장을 기대하고 진행한 투자가 오히려 독이 돼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협업에 치중한 결과 수제맥주 기업이 자체 브랜드로 내세운 제품들은 매대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이미 국내 주요 수제맥주 기업들은 공장 매각을 타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훈 브루웍스맥주아카데미 원장은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알만한 주요 수제맥주 기업들이 공장 매각을 검토했거나, 타진하고 있다”면서 “시장이 침체해 살만한 곳이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카브루 관계자는 “색다른 브랜드나 화려한 디자인에만 몰두하는 포장 중심의 단순 협업 맥주는 줄이고, 이익 중심의 사업 구조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캔 하이볼 제품을 자체 브랜드로 냈고, 수제맥주 역시 구미호 맥주 등 우리 제품에 집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