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은 사라지고, ‘한탕’ 만 남았다.

착실하게 성장했던 우리나라 수제맥주 업체들이 최근 휘청이고 있다. 양적으로는 여전히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질적으로는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분위기다.

어떻게든 몸집을 불려 기업공개(IPO)에 나서려 했던 ‘큰 형님’ 격 기업들마저 거센 역풍을 맞을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다.

13일 편의점 업계에 따르면 2019년 이후 매년 200%대 성장률을 기록했던 수제맥주 관련 매출은 지난해 60%대로 급락했다.

CU를 기준으로 수제맥주 매출 신장률은 2019년 220%에서 2020년 489%로 껑충 뛰었다. 2020년은 편의점 전용 수제맥주 가운데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곰표 맥주’가 등장한 해다.

이후 2021년 신장률은 255%로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3년 연속 신장률 200%를 넘기면서 일취월장 했다. 하지만 지난해 신장률은 60.1%로 뚝 떨어졌다.

GS25도 사정은 비슷하다. 직전 해 대비 수제맥주 매출 신장률은 2019년 353.4%, 2020년 381.4%, 2021년 234.1%로 거침없이 뛰다가 지난해 76.6%로 꺾였다.

편의점을 기준으로 여전히 매출 성장률은 60~70%를 웃돌고 있지만, 업체별로 실적을 놓고 보면 상황은 영 좋지 않다.

제주맥주(276730)는 2021년 5월 우리나라 수제맥주 관련 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거래소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상징적인 기업이다. 상장 당시 ‘사상 첫 수제맥주 상장사’란 기대를 받으며 이른바 ‘테슬라’ 요건(이익 미실현 기업 상장 특례)으로 증시에 입성했다.

그러나 2015년 법인 설립 이후 이어진 적자가 상장 이후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매출까지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제주맥주 누적 매출은 188억원으로 직전해 같은 기간보다 10.15% 줄었다. 판관비를 22% 줄였지만, 영업손실은 여전히 70억원을 넘었다.

제주맥주는 2년전 기자 간담회에서 상장 직후 흑자 전환을 목표로 밝혔지만, 2년 연속으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코스닥 시장은 적자가 4년 연속되면 관리종목, 5년 연속되면 상장폐지를 적용한다. 상장 당일 6040원까지 올랐던 제주맥주 주가는 12일 기준 1300원대로 주저앉았다.

2022년 실적 제외

2021년 곰표 맥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세븐브로이도 지난 해 일년 내내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세븐브로이는 지난해 3분기 매출 84억원, 영업이익 5억8433만원을 기록했다.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134억원)은 37.3%, 영업이익(31억원)은 83.8%가 줄었다.

누적 판매량이 2500만캔을 넘어선 곰표 맥주 이후 다른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면서 ‘원히트 원더(one-hit wonder)’ 즉 반짝 흥행에 그친 것이다.

세븐브로이가 쏘아 올린 곰표 맥주가 성공을 거두자 이후 편의점 업계에는 온갖 브랜드와 협력한 정체불명 맥주가 쏟아졌다. 라면 브랜드, 치약 브랜드, 증권사, 항공사, 껌 브랜드, 아이스크림 브랜드, 각종 캐릭터를 붙인 수제맥주가 편의점에 범람했다.

김지형 한양여대 외식산업과 교수는 “수제맥주가 가진 고유한 맛과 향보다 ‘어떤 브랜드를 캔에 새겼느냐’를 따지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만이 가질 수 있는 개성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품목 간 경계를 허무는 ‘콜라보레이션’과 그럴 듯한 디자인에만 몰두한 나머지 맥주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매출 규모로 우리나라 수제맥주 브랜드 삼총사 가운데 막내 격이지만, 업력은 20년이 넘는 카브루 역시 2021년 22억원 순손실을 기록할 정도로 고전했다.

카브루는 2019년과 2020년 코오롱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90억원 이상을 투자를 받을 정도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 돈은 2021년 새 브루어리(맥주 양조장)을 짓는 데 쓰였다.

늘어난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올해 코스닥 시장 상장에 도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무색할 만큼 실적은 미끄러지는 추세다.

주류 업계 전문가들은 편의점에서 수제맥주 매출은 늘어나는데, 정작 대표 수제맥주 기업들 실적은 고꾸라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수제맥주 기업들이 직접 만드는 제품을 키우지 않고, 편의점이 주문하는 대로 만드는 위탁 생산 형태 제품에 집중한 탓’이라고 평가했다.

2021년 이후 최근 2년 동안 주요 편의점에서 출시한 PB(자체 브랜드) 형태 수제맥주는 120여종에 달한다. 대다수 편의점들은 채널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자사 편의점 브랜드에서만 파는 PB브랜드 마케팅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수제맥주 기업이 이름을 걸고 만드는 간판 상품들은 진열대에서 밀려났다.

한국수제맥주협회 회원사 관계자는 “편의점 채널에 제품을 공급하면 매출이 안정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채널에서 PB형태로 만드는 맥주들은 판매량이 저조하면 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기업 매출에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는 “운이 좋아서 PB 맥주가 인기를 얻어도 해당 맥주를 만든 브랜드를 기억해주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