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주 별명은 ‘골든 스테이트(The Golden State·황금의 주)’다. 1849년 시작한 골드 러시(gold rush) 때 붙은 이름이다. 당시 황금을 찾아 ‘서부 개척자’ 25만여 명이 서부로 몰렸다.
캘리포니아는 포도와 와인, 아몬드를 미국에서도 가장 많이 생산한다. 특히 나파밸리 와인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평이 나있다. 2010년대 중국 자본은 마치 서부 개척을 떠난 카우보이처럼 이 지역에 몰려 들었다.
이들은 슬로언 에스테이트, 실레너스 와이너리, 키호테 와이너리, 한나 니콜 빈야드 같은 굵직한 와이너리를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 뛰던 중국 국민농구선수 야오밍도 야오 패밀리 와인을 세우며 동참했다.
나파밸리에서는 ‘중국인과 거래하면 첫 만남부터 거래 성사 악수까지 24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 최대 5000만달러(약 640억원) 규모 거래가 그만큼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2011년부터 2018년 사이 나파밸리 땅 값은 연 평균 12%씩 뛰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나파밸리 와이너리를 사들이려는 중국인 발길은 뚝 끊겼다. 미국과 중국 관계가 차갑게 식자 ‘비싼 미국 땅을 사는 게 곧 국부 유출 아니냐’는 비난이 중국 내에 거세게 일어난 탓이다.
1990년 무렵 동북아시아 국가 가운데 나파밸리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인 나라는 일본이다. 이어 2010년대 내내 중국이 나파밸리 부동산을 쥐고 흔들었다. 두 나라가 잠잠하자 이제 이 자리를 우리나라가 메우고 있다. 최근 나파밸리 일대에 우리나라 자본이 대거 들어가는 사례, 혹은 우리나라 인력이 빼어난 와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활약상은 점차 늘고 있다.
21일 와인업계에 따르면 한화솔루션(009830)은 미국법인 한화솔루션USA홀딩스코퍼레이션을 통해 세븐 스톤즈라는 나파밸리 부티크 와이너리를 사들였다. 이 와이너리를 사들인 가격은 3400만달러(약 445억원) 정도다.
나파밸리 전문 부동산 중개업자 데미안 아치볼드는 부유층 전문지 롭 리포트와 인터뷰에서 “세븐 스톤즈는 할란 에스테이트나 스크리밍 이글과 같은 캘리포니아 최고급 컬트 와인 반열에 거의 다 오른 와이너리”라며 “나파밸리에서 판매 가능한 와인 양조 면허를 갖춘 매물 가운데 이렇게 광대한 사유지를 갖춘 매물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컬트 와인이란 놀랄 만한 맛과 구하기 힘들 만큼 적은 생산량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와인을 뜻한다. 그 말대로 세븐 스톤즈에서 매년 만드는 와인 병 수는 3600병에서 최대 6000병 정도에 그친다. 전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로 한정해 팔기에도 넉넉치 않은 물량이다. 프랑스 유명 와인산지 보르도 와이너리들은 보통 20만~30만병을 매년 만든다.
이 때문에 세븐 스톤즈 와인을 사려면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다음 일정한 물량을 할당 받아야 한다. 할당 가격은 750ml 한 병당 210달러(약 27만원)이다.
생산량은 적지만, 이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은 평단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와인을 만드는 양조 기술자 애런 포트는 프랑스 유명 와이너리 샤토 트로플롱 몽도와 캘리포니아에서도 손 꼽히는 대규모 와이너리 베린저와 퀸테사 등을 거쳤다. 캘리포니아 주류 단속국에 따르면 세븐 스톤즈 와이너리는 내년 6월 30일까지 유효한 와인 양조 면허를 가지고 있다.
한화솔루션 관계자는 “인사이트 부문 리조트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수를 했다”고 말했다.
한화에 앞서 신세계(004170)는 지난 2월 부동산개발 회사 신세계프라퍼티를 앞세워 나파밸리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와이너리 셰이퍼 빈야드를 인수했다. 셰이퍼 빈야드는 한 해에 총 40만병이 넘는 와인을 만든다. 한화솔루션이 사들인 세븐 스톤즈 와이너리에 비하면 포도밭 규모도 10배 이상 넓다.
대신 매입가도 그만큼 비싸다. 신세계프라퍼티가 셰이퍼 빈야드 인수에 들인 금액은 약 3000억원이다. 이전 10년 동안 중국계 자본이 사들인 나파밸리 와이너리 전체를 다 합친 금액보다 더 많다.
와인컨설팅업체 인터내셔널와인어소시에이츠는 올해 보고서에서 “이전까지 보통 나파밸리 고급 와이너리 거래가는 직전 해 순이익 15~20배 정도를 기준으로 이뤄졌다”며 “신세계프라퍼티가 셰이퍼 빈야드 인수에 지불한 2억5000만달러는 순이익 기준 28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나파밸리 와이너리는 열에 아홉이 가족 단위로 경영을 한다. 그만큼 지분 구조가 단순해서 좀처럼 매물로 나오지 않는다. 설령 매물로 나와도 설립자가 살아 있다면 그를 설득해야 한다. 셰이퍼 빈야드도 설립자 존 셰이퍼가 2019년 영면에 든 후에야 부동산 시장에 나왔다.
신세계도 “프리미엄 와이너리 매물은 희소성이 높은 해외 우량 자산”이라며 “특히 셰이퍼 빈야드는 최상급 와인 생산에 적합한 기온과 토양으로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스택스립 지역에 60만평 규모 포도밭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솔루션이 사들인 세븐 스톤즈 와이너리나, 신세계프라퍼티의 셰이퍼 빈야드는 모두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는 프리미엄 와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일부 와인 전문가들은 와인 같은 유형 자산이 가진 위상을 맨 바닥에서 다시 쌓으려면 최소 10~20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당장 웃돈을 얹어서라도 일단 사고 보는 게 효율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희상 운산(芸山)그룹 회장은 2004년 리빙스턴 와이너리를 인수해 나파밸리 최초 한국인 소유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를 열었다. 인수 당시 다나 에스테이트는 1976년 이후 30년 가까이 인적이 끊긴 폐허에 가까웠다.
이 회장은 포도를 모두 유기농법으로 재배하고, 묘목 하나하나에 수분 센서를 달아 개별 관리에 나섰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최상급 15%만 사용했다.
그 결과 본격적으로 와인을 만든 지 3년 만에 2007년산 다나 에스테이트 와인이 최고 권위를 지닌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았다. 3년 뒤에는 2010년산 역시 100점을 받았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공식 만찬 자리에도 다나 에스테이트에서 만든 ‘바소’ 2017년산이 올랐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설립자 역시 나파밸리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이모스 와이너리를 통해 와인을 만들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나의 모든 것’을 뜻하는 이모스라는 이름을 이수만 설립자 본인이 지었다. 나파밸리에서 생산한 이모스 나파 리저브 2019년산은 유명 와인 평론가 안토니오 갈로니로부터 96점을 받았다.
규모나 명성 면에서 앞선 와이너리에 비하기는 어렵지만, 나파밸리 일대에서 본인 길을 묵묵히 가는 소규모 한국인 생산자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독도를 알리기 위해 재미교포·한국인과 미국인 투자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독도 와이너리는 2011년 이후 10년 넘게 매년 독도 우편번호가 새겨진 와인을 내놓는다. 2011년 8월 도로명주소법 개정 이전 이 와이너리가 만든 와인 겉면에는 799-805라는 숫자가, 최근 만들어진 와인에는 40240이라는 숫자가 크게 적혀 있다.
독도 와이너리 관계자는 “독도가 한국의 섬이라는 사실을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알리기 가장 쉬운 것이 와인이라고 생각했다”며 “미국 비버리힐스 우편번호가 90210이라는 것을 전 세계 수많은 소비자가 아는 것처럼 와인을 통해 독도 우편번호를 세계에 알리자는 뜻에서 과감하게 숫자만 적힌 레이블(겉표지)을 택했다”고 말했다.
2014년 설립한 이노바투스 와이너리는 나파밸리에서 유일한 한국인 여성 와인메이커 세실 박이 운영한다. 이노바투스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은 나파밸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포도 품종을 사용하거나, 독특한 블렌딩(포도 품종을 섞어 와인을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가와 점수에 연연하기보다 테루아(terroir·포도 재배 환경)에 충실한 와인을 만들고자 노력한다”며 “깻묵이나 한약재를 활용해 더 건강한 포도를 키우는 식으로 한국 전통 농법을 와인 양조에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