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儀典)의 꽃은 만찬이다. 대통령이나 총리처럼 한 나라 최고 지도자가 특정 국가를 방문하면 정상회담 직후 국빈 만찬이 열린다. 국빈 만찬은 초청국이 손님에게 베푸는 가장 정중하고 호화스러운 연회다.
이 연회의 하이라이트는 만찬주로 하는 건배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던 정상회담 만찬 테이블도 만찬주 한잔에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옛 문헌을 찾아보면 만찬주와 함께하는 회담 문화는 3000여년 전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시대 향연을 뜻하는 심포지엄(Symposium)에서도 당연히 술은 빠지지 않았다. 심포지엄이라는 단어가 ‘함께 마신다’는 그리스어 ‘심포지온(Symposion)’에서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한-베트남 국빈만찬에서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과 막걸리로 건배했다. 취임 후 첫 국빈만찬이었다. 윤 대통령은 푹 주석과 팔을 걸고 ‘러브샷’까지 나눴다. 국빈 만찬에서 만찬주로 막걸리가 등장하는 것은 외교가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대통령실은 어느 브랜드 막걸리였는지 여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정상회담 만찬주는 보통 전통주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주종이 쓰인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자리에는 꿀이나 사과, 머루를 이용한 국산 와인 다섯 종과 제주산 쌀과 귤 껍질을 이용해 만든 약주 한 종류가 올랐다. 취임식은 국빈 만찬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에서 귀빈이 다수 참석했다.
김지형 한양여대 외식산업과 교수는 “최근 베트남 시장에서 국순당을 포함한 우리나라 막걸리가 ‘쌀 와인(rice wine)’이라는 이름의 프리미엄 주류로 인기를 끌고 있다”며 “베트남이 같은 쌀 문화권이라 쌀로 만든 술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고, 베트남 시장에 진출한 국내 막걸리 업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만찬주를 막걸리로 골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만찬주는 그저 건배를 위한 술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외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 1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렸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위한 국빈 만찬에서 만찬주는 두 나라를 묶어주는 끈 역할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을 찾은 마크롱 대통령에게 미국 최고의 와인 산지로 꼽히는 나파밸리와 소노마밸리, 멘도시노 카운티 와인을 엄선해 대접했다. 화이트 와인으로는 뉴튼 언필터드 나파 밸리 샤도네이, 레드 와인으로는 아나코타 카베르네 소비뇽 나이츠 밸리 2019가 올랐다. 스파클링 와인은 로더러 에스테이트 브륏 로제 NV를 선정했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 세 와인 모두 겉으로 보면 그저 좋은 미국산 와인이지만, 얽힌 사연을 풀어보면 프랑스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평가했다.
‘뉴튼 언필터드 나파 밸리 샤도네이’는 미국 와이너리지만, 고가품 브랜드 루이비통으로 유명한 프랑스 LVMH가 소유하고 있다.
이 와이너리는 지난 2020년 미국 나파밸리를 덮친 대형 화재로 와인 양조장과 지하 셀러 대부분이 파괴됐다. 현재는 한창 복구 작업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사사건건 부딪혔던 두 나라 관계를 다시 재건하자는 의미를 담은 셈이다.
‘아나코타 카베르네 소비뇽 나이츠 밸리’는 미국을 대표하는 와이너리이자 ‘켄달 잭슨’ 시리즈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잭슨 패밀리 와인즈가 소유하고 있다.
이 와이너리는 주류업계에서 ‘가장 미국스러운 와인을 만드는 곳’으로 정평이 났다. 그러나 이날 대접한 와인만큼은 잭슨 가문의 오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프랑스인 피에르 세이양(Pierre Seillan)이 만든다.
세번째 ‘로더러 에스테이트 브륏 로제’는 프랑스 유명 샴페인 하우스 루이 로더러가 미국에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1988년 루이 로더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처음으로 프랑스식 샴페인 제조 방법을 전수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산 스파클링 와인은 프랑스 샴페인에 밀려 국제 시장에서 이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루이 로더러가 첫발을 디딘 이후 미국산 스파클링 와인 품질은 일취월장했다.
재건과 복구, 프랑스와 미국 간의 화합이라는 속뜻을 담은 이 만찬주는 미국은 물론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도 의미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CNN은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과 대(對)중국 견제 차원에서 미국이 외교·안보 정책을 짜려면 대서양을 넘나드는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와인을 통해 부드럽게 드러냈다”고 평했다.
그렇다고 만찬주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정상회담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생긴다. 지난달 24일 열렸던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국빈 만찬은 분위기가 앞선 두 만찬과는 다소 달랐다.
이날 열린 만찬은 찰스 3세 국왕이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열린 국빈 만찬이다. 찰스 3세 국왕은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절 관례대로 말을 탄 근위병이 반기는 홀스가즈(Horse Guards) 환영식 등을 치르고 저녁 늦게 버킹엄궁에서 만찬을 열었다.
만찬에 곁들여진 와인은 모두 다섯 가지로, 면면을 살펴보면 국빈 만찬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식전주로는 영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 릿지뷰가 나왔다. 영국은 최근 프랑스산 샴페인에 버금갈 만큼 빼어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드는 국가로 떠오르고 있다.
이어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 화이트 와인과 보르도 지역 레드와인, 디저트 와인이 음식에 맞춰 나왔다. 식후 입가심을 위해 40년 가까이 묵힌 1983년산 포트와인도 준비했다.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단맛이 강해 주로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마시거나, 식후에 따로 마신다.
다만 남아프리카공화국산 와인은 만찬 테이블에 보이지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와인을 생산하는 국가다. 영국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와인을 포함한 모든 공산품에 있어 아프리카 최대 교역국이다.
이를 두고 일부 남아프리카공화국 매체들은 ‘그 어느 국가보다 만찬 예절을 중시하는 영국 왕실에서 새 국왕 즉위 이후 처음 열리는 국빈 만찬에 내놓은 만찬주라고 하기에는 다소 몰인정(unkind)했다’고 불평했다. 영국과 프랑스산 와인만 잔뜩 상에 오른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데일리 미러 등 영국 매체들은 ‘찰스 3세가 고급 식재료인 광어와 꿩과 함께 오래된 와인을 라마포사 대통령에게 대접했다’며 ‘영연방 수장으로서 이전 여왕 시기 때만큼이나 호화로운 만찬을 즐겼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놨다.
이날 상에 오른 윈저성 일대에서 사냥한 꿩은 영국에서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귀한 식재료다. 윈저성이 ‘왕실의 숲’이기 때문이다. 이번 만찬처럼 왕이 직접 사냥을 허가해서 잡은 꿩고기로 호스트가 요리를 해 손님에게 접대하는 것은 유럽의 오랜 전통이다.
한국소믈리에협회 관계자는 “영국은 원래 300년 전부터 프랑스산 고급 와인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였다”며 “영국 왕실이 보관하던 오래된 프랑스산 와인을 꺼내 귀한 식재료와 내놨다는 의미는 그만큼 정중하게 모신다는 의미로 풀이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