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으로 대표되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그룹과 구찌(Gucci)의 모기업 케링(Kering) 그룹.
전세계 고가품 시장에서 이 두 그룹은 고가품 시장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수차례 들어봤을 만한 굵직한 패션 브랜드를 각각 수십여개 갖고 있다.
LVMH에는 루이비통 외에도 크리스찬 디오르, 불가리, 팬디, 셀린느, 지방시 등이 속해 있다. 케링 그룹은 구찌와 함께 발렌시아가, 보테가베네타, 브리오니, 생로랑 등을 보유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이 두 그룹을 가리켜 ‘명품 대장(luxury boss)’이라 칭했다.
두 명품 대장이 와인 시장에서 맞붙는다면 어떨까. 각자 주옥 같은 브랜드를 무수히 거느린 두 그룹은 최근 와인 중에서도 샴페인(Champagne) 시장에서 유난히 거세게 부딪히는 모양새다.
도전장을 내민 쪽은 케링 그룹이다. 지난 1일 와인 전문 기업 아르테미스 도멘스(Artémis Domaines)는 200년이 넘은 가족 경영 와인기업 ‘메종 에 도멘스 앙리오(Maisons & Domaines Henriot)’ 지분 과반(過半)을 사들였다고 밝혔다.
아르테미스 도멘스는 케링 그룹 회장 프랑수아 앙리 피노(Pinault)가 세운 투자전문사이자 케링그룹 지주회사 ‘아르테미스’ 소속이다.
인수 금액은 공개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유서 깊은 와이너리를 사들일 때 거래금액을 공개하지 않는다. 해당 와이너리가 쌓은 무형적 자산(heritage)을 숫자로 평가하길 꺼리기 때문이다.
다만 와인 투자업계 관계자들은 메종 에 도멘스 앙리오 시장 가치를 이전에 거래된 와이너리와 비교할 때 거래가가 최소 3억유로(약 4300억원)는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달부터 케링 그룹에 편입된 메종 에 도멘스 앙리오는 1808년 창립한 유서 깊은 샴페인 하우스(거대 샴페인 생산자)다. 샴페인은 프랑스 정부가 규정한 지역 명칭 통제에 따라 오로지 프랑스 북부 샹파뉴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거품이 나는 와인)에만 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고급 와인이다.
앙리오는 이 샹파뉴 지역 뿐 아니라, 프랑스에서 단위 별 땅값이 가장 비싼 와인 생산지 부르고뉴(Bourgogne), 미국 유명 와인산지 오리건(Oregon)에도 와이너리를 거느린 거대 와인 기업이다. 케링 그룹은 이번 거래로 순식간에 와이너리 포트폴리오를 두텁게 강화했다.
피노 회장은 인수 후 내놓은 성명에서 “앙리오와 아르테미스 합병은 프랑스 와인이 남긴 보물 같은 유산을 한 깃발 아래 모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라고 말했다.
케링 그룹은 지난 2월에도 유명 샴페인 하우스 자크송(Maison Jacquesson)을 인수했다. 역시 매입가는 밝히지 않았지만, 최소 1억유로(약 1400억원)대를 웃돌 것이 자명하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했다. 불과 9개월 사이 최소 5000억원이 넘는 돈을 쏟아 가면서 두 샴페인 하우스를 사들인 셈이다.
국내에서 LVMH와 케링 그룹은 매년 패션 시장 점유율을 뺏고 빼앗기는 손 꼽히는 맞수다. 그러나 프랑스 기업답게 두 그룹은 와인 시장에서도 지난 30여년간 뜨거운 경쟁을 벌였다. 여태 승기를 쥔 쪽은 LVMH였다.
LVMH는 샴페인은 물론 세계 주류시장에서 전통의 강자로 통한다. LVMH에서 ‘M’이 전 세계 최대 샴페인 브랜드(판매량 기준) ‘모엣 샹동(Moet & Chandon)’을 나타낸다.
H도 와인을 증류해 만든 코냑의 1인자 ‘헤네시(Hennessy)’를 뜻한다. 그만큼 LVMH 그룹에서 샴페인이 차지하는 비중과 전 세계 샴페인 시장에서 LVMH가 차지한 입지 모두 막대하다. 돔 페리뇽, 크룩, 뵈브 클리코처럼 대중성과 품질을 모두 잡은 거대 샴페인 하우스들이 LVMH 소유다.
반면 케링 그룹은 1992년에야 투자회사 아르테미스를 통해 와이너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본업이 고가 패션 브랜드 사업이었던 LVMH와 달리, 케링 그룹은 뿌리를 훨씬 영세한 목재(木材) 회사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피노 케링 그룹 회장은 부지런히 사업 수완을 발휘해 알짜배기 와이너리들을 부지런히 사들였다. 보르도 5대 와이너리 가운데 하나인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가 대표적이다.
올해 인수한 두 샴페인 하우스도 인지도 면에서는 LVMH가 보유한 곳들과 직접 비교하기 어렵지만, 샴페인 품질만큼은 비평가와 소비자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전문가들은 그간 샴페인 지역에서 잠잠했던 케링 그룹이 맞불을 놓으면서 두 명품 대장이 벌이는 ‘샴페인 전쟁’이 더 격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랑스 정부는 샴페인 하우스를 하나의 문화 유산으로 취급한다. 이 방침 상 외국계 기업이나, 프랑스 투자자 지분이 일정 부분 이상 확보되지 않은 자본이 유서 깊은 샴페인 하우스 지분을 절반 넘게 사들이려면 심히 까다로운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두 명품 대장이 마련한 샴페인 하우스 인수 경쟁 링 위에 다른 외국계 자본이 끼어들 가능성이 사실상 거의 없는 셈이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기간 잠시 주춤했던 전 세계 샴페인 소비량은 지난해 이후 다시 급증하고 있다.
샴페인 생산자 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샴페인 출하 병수는 총 1억8000만병으로 이전 신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 매출 역시 가(假)집계 기준 55억유로(약 7조8000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 확실시된다. 프랑스 농무부에 따르면 심지어 올해 샴페인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16%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 유명 와인 매체 와인스펙테이터는 “피노 회장의 라이벌 베르나르 아르노 LVMH 그룹 회장 역시 지난해 랩스타 제이지(JAY-Z) 소유였던 ‘아르망 드 브리냑(Armand de Brignac)’ 지분 50%를 사들였다”며 “가족 소유물로 여겨졌던 소규모 와이너리에 최근 몇 년 동안 기업 투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고가품 업계가 프랑스 와인 사업 구도를 다시 편성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