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세계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360억병에 달하는 와인들이 새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나라 전 국민이 하루에 두 병씩 먹어야 겨우 사라질 만큼 많은 양이다. 가격이 와인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지는 않지만, 항상 ‘이 수많은 와인 가운데 가장 비싼 와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흔히 이 질문을 던지면 와인 애호가 가운데 상당수는 ‘로마네꽁티(Romanée Conti)’라고 답한다. 로마네꽁티는 국내에서도 매년 백화점 최고가(最高價) 명절 선물이나, ‘회장님의 와인’ 같은 이름표가 달릴만큼 인지도가 높다.
4일 기준 로마네꽁티는 국제 와인시장에서 750mL(밀리리터) 한 병당 약 3600만원(2만5330달러)에 거래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값에 주류에 붙는 세금과 운송비, 오른 환율까지 감안해 보통 병당 7000만원대에 팔린다.
수십년 가까이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던 로마네꽁띠는 최근 한 프랑스 할머니가 만든 와인에 자리를 빼앗겼다. 세계 와인 거래 시장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가격비교 플랫폼 ‘와인서처’에 따르면 이달 기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은 ‘도멘 리로이 뮈지니 그랑크뤼(Domaine Leroy Musigny Grand Cru)’로 집계됐다.
이 플랫폼은 현재 시장에서 실제 거래되는 와인을 대상으로 소매가를 비교한다. 경매나 도매, 개인 간 거래, 한정 판매처럼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은 집계에서 빠진다.
연도를 고려하지 않고,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도멘 리로이 뮈지니 그랑크뤼 한병 당 평균 가격은 3만7700달러(약 5400만원)에 달한다. 로마네꽁티보다 1만달러(약 1450만원) 넘게 비쌌다. 2022년형 현대 그랜저 최고등급 모델을 풀옵션으로 사고도 남는 돈이다.
와인 한 병(750mL)에서 보통 7잔이 나온다고 감안하면 이 와인 1잔에 770만원이라는 뜻이다. 2·3·4위 와인도 전부 이 ‘랄루 비즈-리로이(Lalou Bize-Leroy)’ 할머니가 만든 와인이 차지했다. 로마네꽁티는 올해 5위로 밀려나며 체면을 구겼다.
평소 와인을 어지간히 즐겨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면 리로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리로이는 전 세계 와인 전문가와 애호가 사이에서 최고의 생산자로 꼽힌다. ‘태어난 지 15분 만에 입술에 와인을 댔다’, ‘3살 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그녀의 천재적인 미각과 와인을 감별하는 능력은 정평이 나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그녀를 ‘남성 우월적인 프랑스 와인계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여성 생산자’로 꼽았다. 그는 동시에 2019년산 도멘 리로이 뮈지니 그랑크뤼에 100점 만점을 줬다. 흠 잡을래야 흠 잡을 데가 없는 무결점 와인이라는 의미다.
경제전문매체 포브스 역시 지난해 1월 그녀에게 ‘부르고뉴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부르고뉴는 전 세계 최고가 와인이 쏟아져 나오는 프랑스 유명 와인 산지다.
이번 달 집계에서도 상위 10개 와인 가운데 9위를 제외한 나머지 9개 와인이 모두 이 지역에서 나왔다. 이렇게 위대한 생산자가 중에서도 리로이 여사가 보여주는 역량은 가장 탁월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리로이 여사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직접 로마네꽁티 공동 경영자로 활동했을 만큼 상업 수완도 빼어나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네꽁티가 20세기 후반 다른 생산자들을 앞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 와인업계 정설이다.
리로이 여사는 경영 방침을 놓고 로마네꽁티의 다른 경영자와 마찰이 생기자 제 발로 나와 본인 양조장을 차렸다. 이 때문에 과거 일부 전문가들은 ‘리로이 여사 와인은 로마네꽁티보다 저렴하지만, 품질은 그에 준한다’고 평가했다.
여태 로마네꽁티 ‘대안’ 취급을 받던 리로이 여사 와인들은 올해 갑자기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와인서처 통계에 따르면 올해 최고가 와인에 꼽힌 도멘 리로이 뮈지니 그랑크뤼는 지난해 1월만 하더라도 2만1257달러(약 3000만원) 정도에 거래됐다.
하지만 1년 8개월 사이 가격이 77% 올라 2400만원 가까이 뛰었다. 2·3·4위를 차지한 그녀의 다른 와인들 역시 소매가가 지난해 대비 51%, 93%, 92%씩 뛰었다. 올들어 이들 와인은 지난해 대비 최대 90% 넘게 가격이 급등하면서 로마네꽁티를 뒷자리로 밀어냈다.
와인 전문가들은 리로이 여사 와인이 급등한 이유로 그녀의 나이를 꼽는다. 1932년생 리로이 여사는 올해로 나이가 만 90세다. 그녀와 드물게 가까이 지내는 부르고뉴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 전문 매체들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녀는 지난해까지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밭에 나가 직접 포도덩쿨을 정리하고, 통나무통을 점검하며 양조 과정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제 아무리 리로이 여사라도 이제 곧 은퇴해 여생을 즐길 날이 멀지 않았다는 추측이 나온다. 지금 시장에 풀린 그녀의 와인이 ‘여왕의 마지막 작품’일 수 있는 셈이다.
와인 시장에서는 전설적인 생산자가 은퇴하면, 마치 예술가 사후(死後) 미술품 가격이 오르듯 그가 은퇴 이전 만든 와인 값이 오르는 경향이 뚜렷하다. 미술품은 보관만 잘하면 영원히 간직할 수 있지만, 와인은 최적 상태로 마실 시기가 길어야 수십년으로 한정돼 있어 은퇴를 전후해 가격 변동이 극심하다.
와인전문 투자사 레어와인인베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리로이 부인이 와인업계를 떠나면 와인 시장은 ‘리로이 부인 전(前)과 후(後)’로 나눠질 것’이라며 “그녀가 직접 만든 와인은 그 이후 다른 사람 손으로 생산한 와인보다 훨씬 가치가 빠르게 오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투자사는 “너무 늦기 전에 전설적인 와인에 다가갈 만한 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서둘러 그녀의 와인을 사들여라”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