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3시 ‘제21회 한국 소믈리에 대회’ 결선이 열린 서울 종로구 JW메리어트호텔 동대문 스퀘어 그랜드볼룸. 결선 참가자 4명 가운데 가장 먼저 시험을 치르는 김주용(41·레스토랑 주은) 소믈리에가 능숙한 솜씨로 붉은 와인을 오리를 닮은 커다란 유리병에 따르기 시작했다.

결선에 나온 여섯 과제 가운데 절정에 해당하는 다섯 번째 과제였다. 100명이 넘는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김주용 소믈리에 손끝을 주시했다. 이번 과제는 손님이 주문한 오래된 적(赤)포도주를 조심스럽게 열어 5분 동안 심사위원 7명 잔에 침전물 없이 완벽하게 따르는지 본다.

김 소믈리에는 성냥을 꺼내 양초에 불을 피웠다. 와인병에 남아있는 포도 찌꺼기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그는 몇 년간 쌓인 침전물이 쓸려 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도주만 따라냈다. 그 동안 김 소믈리에는 “이 유리병(디캔터)은 리델사(社)에서 손으로 만든 제품입니다”라며 “드시는 와인과 꼭 맞는 음식을 추천해드릴까요?”라고 심사위원에게 되묻는 여유까지 보였다.

2022 제21회 한국 소믈리에 대회에서 우승한 김주용 레스토랑 주은 소믈리에. /소펙사

김 소믈리에는 결선 세 번째 과제였던 샴페인(프랑스 샹파뉴 지방 스파클링 와인) 서빙에서도 다른 진출자들을 앞섰다. 거품이 많이 나는 샴페인은 7명에게 넘치지 않을 만큼 같은 양을 나눠 따르기가 쉽지 않다. 그는 6분 동안 심사위원 7명에게 샴페인을 정확히 같은 양으로 나눠줬다.

서빙 도중 ‘샴페인 대신 미모사를 만들어 달라’는 한 심사위원의 돌발 부탁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미모사는 샴페인에 오렌지 주스를 섞은 칵테일이다. 그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도 빈 잔 없이 샴페인과 칵테일을 모두 채웠다. 그 결과 다른 세 결선 참가자를 제치고 대한민국 최고 소믈리에 자리에 우뚝 섰다.

이날 열린 한국 소믈리에 대회는 프랑스 농식품부가 주최하고 소펙사(SOPEXA·프랑스 농식품 진흥공사) 코리아가 주관을 맡았다. 소펙사 코리아는 1996년 당시 와인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믈리에 경연대회를 시작했다. 국내 소믈리에 대회 가운데 가장 유서가 깊다.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매년 커지면서 이제 국내에도 소믈리에들이 실력을 겨룰 대회가 많아졌지만, 역사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와인 업계에서는 여전히 이 대회를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꼽는다.

특히 올해 대회는 프랑스 보르도∙아키텐 지역 소믈리에 협회(UDSF B.A) 명예 회장이자 프랑스 소믈리에 대회 기술 위원장 장 파스칼 포베르(Jean-Pascal Paubert)가 심사위원장으로 참가해 공신력을 더했다. 이번 결선에서 1·2위를 차지한 소믈리에는 아시아 10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가 실력을 겨루는 아시아 소믈리에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30일 오전 서울 중구 JW메리어트동대문스퀘어서울에서 열린 '제21회 한국 소믈리에 대회 결선'에 앞서 참가 소믈리에들이 와인을 시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주용 레스토랑 주은 소믈리에, 이현재 밍글스 소믈리에, 한희수 롯데백화점 소믈리에, 김민준 정식당 소믈리에. /연합뉴스

김주용 소믈리에는 결선 내내 맞붙은 다른 참가자들보다 오랜 연륜을 자랑했다. 그는 이미 지난해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가 주최하는 ‘2021 한국 국가대표 소믈리에 경기대회’ 국가대표 부문에서 우승한 실력자다. 이번에 우승한 한국 소믈리에 대회에서는 2017년 4위, 2020년 2위를 기록했다.

여러 대회에 참가하며 다부지게 쌓은 경험은 이번 대회에서도 빛났다. 그는 소믈리에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에 속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와인 겉면을 가린 채 하는 시음회)’에서 예리한 미각과 방대한 지식을 뽐냈다.

결선 첫 번째 관문은 색깔을 알 수 없도록 검은 잔에 담긴 와인이 어떤 포도로 어느 지역에서 만들었는지 맞추고, 해당 와인과 잘 맞는 그 지역 치즈를 3분 안에 맞춰야 하는 과제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와인 품종과 특징을 집어내야 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세계적인 소믈리에들도 어려워하는 과제다. 적게 추려도 20종이 넘는 주요 포도 품종과 300여개를 넘는 프랑스 생산지를 조합하면 어림잡아 수천 가지 조합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 샤블리(Chablis) 프리미에 크뤼(1er)에는 같은 지역에서 나온 에푸아스 치즈를 추천합니다. 다른 화이트 와인은 루아르(Loire) 지방 소비뇽 블랑으로 만든 상세르 와인입니다. 여기에는 샤비뇰 치즈를 권합니다.

이 과제에서 김 소믈리에가 내놓은 답변은 포베르 심사위원장이 결선 총평에서 말한 모범 답안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물론 우승 길목에 장애물이 없진 않았다. 그는 칵테일 4잔을 만들어 서빙하는 두 번째 과제에서 위기를 맞았다. 그는 애플 브랜디 사워 2잔과 잭 로즈 2잔을 4분 안에 만들어야 했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칵테일을 채 다 만들지 못했다. 네 번째 과제로 나온 또 다른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일부 틀린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능숙하게 와인을 서빙하는 능력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심사위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려했다. 특히 와인병과 디캔터가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미세하게 힘을 조절하고, 갑작스런 부탁에도 테이블이 아닌 바(Bar)에서 미모사 칵테일을 만든 점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승기를 잡았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박수진 WSA아카데미 원장은 “참가자 가운데 김주용 소믈리에가 결선 내내 가장 안정적으로 서빙을 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이 높은 점수를 줬다”며 “샴페인을 다루는 능력이라든가, 몸에 배어있는 와인을 다루는 자세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주용 소믈리에는 한국 최고 소믈리에라는 영예와 함께 부상으로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 기회를 받았다. 준우승을 차지한 한희수 롯데백화점 소믈리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해 김 소믈리에와 오는 12월 베트남에서 열리는 8회 아시아 소믈리에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김 소믈리에는 무수한 도전 끝에 마침내 얻어낸 우승 소감을 발표하면서 “이 영광을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박종선 소믈리에에게 바치고 싶다”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소믈리에는 너무 어려운 직업이지만, 동시에 너무 행복한 직업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며 “앞으로 안주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소믈리에가 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