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단전부에 위치한 논산은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정착해온 곳이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위치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이 땅을 지배해, 계백 장군이 이끄는 5000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 바로 논산이다.

논산에는 ‘365일 햇빛이 잘 드는 동네’ 양촌(햇빛촌)이 있다. 논산시 양촌면의 인구는 다 합해야 6500여명 정도. 그러나, 이곳에는 국내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양조장이 있다.

이름하여 양촌양조장. 1923년 2월 이종진 1대 대표의 가내 주조로 문을 열었고, 아들인 2대 이명제 대표를 거쳐 손자인 이동중 3대 대표가 양조장을 계승하고 있는 100년 전통의 술도가다. 전국에 100년 양조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3대째 같은 장소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이곳 양촌양조장 말고는 찾기 어렵다. 2016년에는 정부로부터 ‘찾아가는 양조장’에도 선정됐다. 이동중 대표는 군 제대 직후인 1978년부터 술 빚기를 시작, 40년 이상 한 장소에서 술을 만들고 있는 ‘술 빚기의 진정한 달인’이다.

양촌양조장 한복판에는 양조장과 100년 역사를 함께 한 우물이 우뚝 버티고 있다. 이동중 대표의 설명이다. “1920년대 할아버지께서 가내주조로 막걸리 사업을 하실 때부터 사용해온 우물입니다. 6개월마다 실시하는 46개 항목의 수질검사를 다 통과해, 막걸리의 재료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청정지역이어서 지금도 근처에 공장이 들어설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양촌양조 이동중 대표가 자사 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대표는 40여년 동안 막걸리, 청주, 소주를 빚어온 '전통술 달인'이다. /박순욱 기자

그러나, 한때 이 우물에도 ‘위기’가 있었다. 1970년대 말부터 우물 수위가 낮아져 퍼올리는 수량이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우물을 더 깊게 팠더니 이번에는 모래 섞인 물이 나왔다. 근처 강 바닥 토질이 자갈, 모래인 탓에 막걸리 재료로 쓸 수 없는 물이 나온 것이다. 고민한 끝에 우물 바닥에 항아리를 묻었더니 더 이상 모래가 섞이지 않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항아리가 모래를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물 덮개에는 ‘항아리가 묻힌 우물’이란 글자가 적혀 있다. 우물 물은 처음에는 두레박을 썼고, 그 다음엔 손 펌프로 물을 끌어올렸고, 지금은 모터를 이용하고 있다.

양촌양조 양조장 안에 있는 우물. 100년 가까이 막걸리 원료로 쓰고 있다.

양촌양조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있다. 건물을 지탱하는 서까래에 적혀진 상량문이다. 상량문은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까닭과 공사한 날짜, 시간 등을 적은 글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 양촌양조장 상량문에는 ‘쇼와 6년(1931년)’이라는 양조장 건립연도가 적혀 있다. 이동중 대표는 “할아버지께서 1923년에 가내 양조장 형태로 술 양조를 시작하셨다가, 그 이후인 1931년에 양조장을 지어, 지금까지 한 장소에서 술을 빚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이에 해방을 맞고, 전쟁을 겪는 등 나라 전체는 큰 부침을 겪었지만, 양조장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 ‘변함 없는’ 술맛처럼.

양촌양조 대들보 상량문에 '소화 6년 6월 9일'이라고 쓰여 있다. 소화 6년은 1931년이다. 이동중 대표의 할아버지가 1923년에 가내 양조장으로 출발했다가, 1931년 정식으로 양조장을 지었다. /박순욱 기자

같은 시대에 지어진 양조장 대부분이 일본식 건물 양식이지만, 양촌양조장은 한옥식으로만 지어졌다는 점이 독특하다. 1931년 목조건물로 건립된 양촌양조장은 지을 때부터 최상의 막걸리 양조를 위해 설계됐다. 천정과 벽 사이에 왕겨를 넣어, 재래식 통풍구조를 갖춰, 막걸리 발효 시 나오는 높은 열과 습도 등을 자연적으로 밖으로 빼내 내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오랜 세월, 술을 빚어온 우리 선조들의 혜안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현재 양조장 내부는 크게 반지하와 1층, 반2층의 복층 구조로 돼 있다. 반지하 공간은 막걸리의 발효-숙성실, 1층은 제성(막걸리 거르는 공정) 탱크와 우물이 있는 작업공간, 반2층은 발효체험 전시실로 쓰이고 있다. 발효체험실은 원래 고두밥을 냉각시키는 공간으로 쓰였는데, 반지하 공간과 연결된 통로를 통해 냉각시킨 고두밥을 밑으로 내려보냈었다. 현재 이 발효체험실 바닥에는 투명유리를 덧댄 구멍을 만들어 반지하의 발효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통풍구를 통해 발효향을 직접 맡을 수 있다. 발효체험실 벽 곳곳에는 효모란 무엇인가? 누룩이란 무엇인가? 술이 익으면서 왜 기포가 생길까? 술 향기는 어디서 오는걸까? 양촌양조장이 걸어온 길 등의 안내문이 적혀 있어, 양촌양조의 내력과 막걸리에 대한 상식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양촌양조 뒤뜰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이들 항아리에 막걸리를 담갔다. ‘찾아가는 양조장’ 홍신애 홍보대사와 허영만 화백이 항아리 뚜껑을 들어보이고 있다.

양조장을 둘러보면, 100년 역사가 고스란히 진열돼 있는 느낌을 받는다. 우선 장독대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술항아리들이 퇴역한 장군처럼 한가롭게 햇빛을 쬐고 있다. 철사로 꿰맨 항아리도 있고, 1969년, 1974년 등의 연도가 표시된 오랜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원래 집 뒤뜰에 모아두었던 항아리들을 사람들이 찾아와 신기하게 바라보자, 마당으로 가지런히 옮겨왔다. 그랬더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항아리 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가는 경우가 많아, 양조장이 한결 밝아졌다. 그밖에도 술 빚는데 쓰던 누룩 틀, 막걸리 압착기 등을 이곳저곳 놓아둬 ‘미니 술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양촌양조는 막걸리, 청주, 소주를 생산한다. 우선 막걸리는 종류가 많다. 양촌생막걸리, 양촌생동동주, 우렁이쌀손막걸리, 우렁이쌀드라이. 이중 양촌생막걸리와 양촌생동동주는 ‘동네 술’이다. 양조장이 있는 논산 일대에 주로 유통된다. 반면에 친환경 무농약 우렁이쌀로 만든 2종의 막걸리는 ‘전국 술’이다. 전국의 유명 전통주점에서 취급한다. 가격도 동네 술인 양촌생막걸리보다 2배 정도 비싸다.

양촌생막걸리가 ‘동네 술’이라고 얕잡아 보면 안된다. 양촌양조의 가장 대중적인 제품인 ‘양촌 생막걸리’는 국내산 쌀, 밀, 누룩으로 만든다. 달지 않고, 담백한 맛이다. 2019년 ‘찾아가는 양조장 투어’에 동행한 허영만 화백은 “이곳 막걸리 중 양촌생막걸리가 가장 내 입맛에 맞다”고 했다. 이동중 대표는 “자연의 단맛을 더 내기 위해 양촌생막걸리는 완전발효를 하지 않고, 당분을 일부 남긴다”고 말했다. 물론 천연감미료인 효소처리스테비아도 일부 들어간다. 우렁이쌀 드라이, 우렁이쌀청주, 소주는 감미료를 쓰지 않는다.

다만, 양촌생막걸리는 외부에서 가져온 밀가루를 쌀과 같이 섞어서 술을 빚어, ‘지역특산주’ 대우를 받지 못한다. 지역특산주가 아니면 온라인 판매를 할 수 없다. 때문에 100% 지역쌀로 만드는 우렁이쌀 막걸리 2종도 지역특산주 대우를 못받아 온라인 판매를 하지 못한다. 이동중 대표는 “지역 외에서 생산하는 밀가루를 쓴다는 이유로 막걸리는 지역특산주 면허를 받지 못했다”며 “우렁이쌀 청주와 소주 ‘여유’는 지역특산주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세청 유권해석에 따르면, 한 장소에서 생산하는 막걸리들을 일반 술과 지역특산주로 구분해, 2개의 면허를 줄 수 없다고 한다. 우렁이쌀 막걸리를 지역특산주로 인정받으려면, 장소를 옮겨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의 '100년 양조장' 양촌양조의 주요 제품들. 왼쪽부터 양촌생막걸리, 양촌생동동주, 우렁이쌀드라이, 우렁이쌀손막걸리, 우렁이쌀청주, 여유(소주). /박순욱 기자

양촌양조가 2015년에 새로 내놓은 ‘우렁이쌀 손막걸리’는 우렁이 농법으로 100% 무농약 재배한 논산 햅쌀로 빚은 막걸리다. 발효기간(20일)이 기존 제품(8일)보다 3배 이상 길다. 알코올도수도 7.5도로 다소 높다. ‘우렁이쌀 손막걸리 드라이’(블랙라벨)은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제품으로 역시 달지 않다. 첨가물을 넣지 않는 대신, 술 원료로 멥쌀이 아닌 찹쌀로 빚었다.

그렇다면, 무농약쌀(우렁이쌀)과 일반쌀로 빚은 막걸리의 맛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술맛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 이동중 대표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막걸리 맛은 원료인 쌀이 무농약쌀인가, 일반쌀인가의 차이보다는 막걸리 양조과정에서 발효온도, 발효기간, 발효제 등에 더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만, 친환경쌀(무농약쌀)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에 우렁이쌀 막걸리를 새로 내놓았다고 한다. 우렁이쌀은 일반쌀보다 20~30% 더 비싸다. 술 가격에는 이런 제품 원가가 고스란히, 다소 과장되게 반영돼 있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비싼 친환경 제품을 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음에 소개할 술은 우렁이쌀 청주다. 발효 기간만 30일. 밑술은 멥쌀, 2번의 덧술은 찹쌀을 사용한다. 전통누룩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주세법상 약주가 아닌 청주로 분류된다. 가격은 1만6000원. 국내 최대 전통주점인 서울 백곰막걸리에서도 인기리에 팔린다. 이동중 대표는 “우렁이쌀청주에 전통 누룩을 쓰지 않는 이유는, 안정적인 술맛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용하는 입국 누룩은 잡균이 없어, 술 맛이 늘 일정하다는 설명이다.

누룩 얘기가 나온 김에 누룩은 어디 걸 쓰느냐고 물었다.

“흩임 누룩(곡물의 낱알이 떨어져 있는 누룩)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누룩실이 따로 있다. 양촌양조의 모든 술은 직접 만든 누룩으로 발효시킨다. 우렁이쌀 청주에는 백국균이 주로 들어가지만, 일부 황국균 누룩을 쓴다. 그러면, 술이 부드럽고, 향이 더 독특하다. 청주 빚을 때는 1차 덧술에는 백국균 누룩, 2차 덧술에는 황국균 누룩이 들어간다. 효모 발효과정에서 나는 사과, 바닐라향이 있다. 발효주는 독특한 향이 있어야 한다.”

양촌양조가 최근에 내놓은 술이 소주 ‘여유’다. 19도, 25도, 40도 3종류가 있다. 18도 정도의 술덧을 증류한다. 1000l(리터)를 증류하면 370l의 45도 소주가 생산된다. 증류는 한번만 한다. 여유 소주는 바닐라, 사과향이 난다. 곡물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이다. 한국식품연구원과 기술제휴해서 만든 술로, 2022년 대한민국주류대상에서 대상(소주부문)을 받았다. 이동중 대표는 “소주 중에서는 25도 여유 소주가 가장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양촌양조장 이동중 대표는 9남매 중의 넷째다. 아버지 이명재 2대 사장도 장남이 아니지만, 가업으로 양조장을 물려받았다. 양촌양조장을 창업한 그의 할아버지 이종진 1대 사장 역시 집안의 종손이 아니지만, 집안의 종손 노릇을 하면서 선대부터 살았던 마을과 집안을 지켰다. 그렇다면 양촌양조의 4대 사장은?

“조카들 중 전통주에 관심 있는 애들이 있어, 양촌양조장을 이어나갈 것으로 본다. 지금도 수출업무나 병 디자인 개발 등은 조카들이 돕고 있다.”

양촌양조 이동중 대표가 충남도지사로부터 받은 감사패(한국유교문화진흥원 명예회원)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앞서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내려온 유물 2500여점을 충남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대표 뒤로 보이는 그림들이 그중 하나다. /박순욱 기자

역사가 오랜 양촌양조장은 다른 양조장과 다른 게 또 하나 있다. 보물급 유산들이 많다. 이동중 대표는, 선대 조상이 영조 임금으로부터 직접 받은 족자인 ‘군신제회도’ 등 집안에서 오랫동안 보관해온 2500여점의 ‘집안 유물’을 충남역사박물관에 기탁했다. 이 족자는 1726년(영조 2년) 12월 영조가 희정당에서 친정하는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고, 시를 짓게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충남도지사는 지난 3월, 이동중 대표에게 ‘한국유교문화진흥원 명예회원’ 패를 보냈다. 보물급 유물들을 지방정부에 기탁한 공로를 인정해, 도지사가 감사패를 보낸 것이다. ‘100년 양조장’과 직접 관련된 일은 아닐지라도, 한 곳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명망가 집안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