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식품기업의 오너 3세가 임원 승진을 통해 경영 일선에 나서며 업계 세대 교체가 빨라지고 있다.

왼쪽부터 이선호 CJ제일제당 담당, 신상열 농심 구매담당, 허희수 섹타나인 부사장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선호(31) 부장은 27일 발표된 CJ그룹 임원 인사에서 승진, 내년 1월 1일부터 CJ제일제당(097950) 식품전략기획 1담당으로 근무하게 된다.

1990년생인 이선호 부장은 미국 컬럼비아대 금융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2013년 CJ제일제당에 입사했다. 입사 후에는 식품전략기획팀과 바이오사업팀에서 근무하며, 미국 냉동식품업체 슈완스 인수 후 통합전략(PMI) 작업 등을 주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 부서에서 경영 수업을 받던 이 부장은 2019년 마약 밀반입 혐의를 받으면서 일선 업무에서 물러났다. 당시 회사에서 정직 처분을 받아 1년 4개월여간의 자숙 기간을 가진 이 부장은 올해 초 글로벌비즈니스 담당으로 복귀했다.

경영 복귀 후 NBA 명문팀인 LA레이커스와의 글로벌 파트너십 체결과 PGA 투어 대회인 CJ컵의 흥행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이 부장이 식품전략기획 1담당으로 근무하면서 비건 브랜드 ‘플랜테이블’ 등 신사업 추진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CJ그룹이 이번 인사를 앞두고 사장부터 상무보까지 임원 직급을 ‘경영리더’로 일원화하면서 이 부장의 경영 승계가 빨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연말 정기 임원인사를 거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바로 사장직급의 직책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다.

농심(004370)도 3세 경영 수업이 빨라지고 있다. 창업주 고(故) 신춘호 회장이 별세하면서 신동원 부회장이 회장으로 올랐고, 신 회장의 장남인 신상열(28) 부장도 지난달 발표된 2022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상무로 승진했다.

1993년생인 신상열 상무는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뒤, 2019년 농심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경영기획팀에서 기획과 예산 관련 업무를 맡았던 그는 임원 승진과 함께 구매담당으로 발령이 났다. 구매담당은 원자재 수급과 생산 원가를 관할하는 자리로 식품기업에서는 핵심 부서로 통한다.

허영인 SPC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43) 부사장도 지난달말 SPC그룹의 네트워크 시스템 관련 계열사인 섹타나인의 신규사업 책임임원으로 업무에 복귀했다. 2018년 액상대마 밀수 및 흡연 혐의를 받아 경영에서 배제된 지 3년만이다.

허 부사장은 2007년 파리크라상 상무로 입사해 파리크라상 마케팅본부장, SPC그룹 전략기획실 미래사업부문장 등을 지냈다. 고급 버거 브랜드 ‘쉐이크쉑’은 허 부사장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지난해 국내에 들어온 미국 샌드위치 브랜드 ‘에그슬럿’도 허 부사장이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엔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인 임세령(44) 전무가 대상홀딩스(084690)대상(001680)의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임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그동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됐던 대상그룹은 ‘오너 경영 시대’를 맞게 됐다. 이에 대해 대상 측은”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신속하고 정확한 전략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구조 개편”이라고 설명했다.

외부에서 경영 수업을 받던 3세들도 본가로 복귀하며 승계 준비에 돌입했다. 담철곤 오리온(271560) 회장의 장남인 서원(32)씨는 카카오의 인공지능 자회사인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서 근무하다 지난 7월 오리온으로 입사했다. 서원씨는 현재 오리온 경영지원팀 수석부장으로 근무 중이다.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의 장남 오영(35)씨도 지난 10월 매일유업(267980)에 입사했다. 2014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한 그는 신세계그룹과 신세계프라퍼티 등에서 재무 담당으로 근무하며 경험을 쌓았다. 오영씨는 현재 생산물류 혁신 담당 임원으로 근무 중이다.

함영준 오뚜기(007310) 회장의 장남인 윤식(30)씨도 올해 초 오뚜기에 입사해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그는 현재 경영지원팀에서 사원으로 근무 중이다.

업계에서는 식품업계 3세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하면서 ‘안정적인 승계’ 작업이 핵심 화두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창업주와 함께 회사를 일군 2세 경영인은 업에 대한 애착이 강한 반면, 기업이 규모를 갖춘 상황에서 나고 자란 3세들은 이른바 ‘금수저’로 불리며 유복하게 자라 경영 위기 시 생존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반면 조기 교육과 유학 등을 통해 경영에 대한 전문지식과 해외 시장에 대한 이해도와 같은 부분은 오히려 선대보다 나을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자금 마련도 숙제다. 기업인들이 승계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탈법·탈세 논란이 불거져, 회사의 명예가 실추되거나 과징금이 부과돼 기업에 재정적인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오너일가의 개인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거나, 통행세 등의 방식으로 부당 수익을 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탈법과 탈세를 통한 경영 승계는 기업의 오너리스크를 드러내고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서 “다행히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중시되면서 납세 등 회사의 책무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기업인들도 이에 부응하는 듯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어 “다만 국내 조세 제도가 경영 승계의 장애물이 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고민이 필요하다”면서 “기업의 영속성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 도입에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