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나 기분에 따라 술이 당기기도 하고, 또 마시고 싶은 술이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계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봄에 마시고 싶은 스타일의 술과 가을에 마시고 싶은 술 스타일은 같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철과일로 술을 빚어 계절마다 다른 술을 내놓고 있습니다.”
서울 문래동의 작은 양조장 ‘날씨양조장’ 한종진 대표의 ‘술철학’이다. 그가 만드는 술은 막걸리다. 그러나, 막걸리 같지 않은 막걸리다. 첫째, 단맛을 철저히 뺐다. 거의 단맛이 나지 않는다. 세번 담금하는 삼양주 스타일이면서, 단맛이 가장 덜 나는 고두밥으로 밑술과 덧술을 만든다. 감칠맛을 내려고 사용하는 찹쌀도 단맛을 줄이려고 소량만 쓴다. 대신 신맛이 강하다. 일반적인 프리미엄 막걸리들이 ‘단맛과 신맛의 조화’를 추구하는데 반해, 날씨양조장 제품들은 ‘신맛과 드라이(달지 않은)한 맛’ 일색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게 무슨 막걸리야?”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워낙 소량생산이라 만드는 즉시 품절이다.
둘째, 고급와인의 대명사인 부르고뉴 유리병을 사용한다. 지금은 한두군데 비슷한 술병을 사용하는 막걸리들이 있지만, 부르고뉴 유리병을 막걸리에 처음 사용한 곳은 날씨양조장이 처음이다. 게다가 샴페인 뚜껑처럼 철 와이어를 사용해, 얼핏 보면 고급 스파클링와인 같다. 750ml 한병 가격이 2만원대로 꽤 비싸다.
셋째, 쌀을 기본으로, 다른 재료에 비해 가장 많은 양을 사용하면서도 부재료인 제철과일 맛과 향이 돋보이는 계절 막걸리다. 봄에는 한라봉과 귤껍질을 넣은 ‘봄비’ 막걸리, 여름에는 수박이 들어간 ‘여름바다’ 막걸리, 가을엔 캠벨 포도가 들어간 ‘해질녘’ 막걸리를 내놓는다. 대부분 300병 내외의 한정수량만 만든다.
한마디로 대중적, 상업적인 막걸리는 아예 만들지 않는다. 철공소 골목으로 유명한 서울 문래동에 자리한 날씨양조장을 찾았다. 근처에 흔한 안내 이정표 하나 없는 작은 양조장이다. 작은 마당이 있는, 오래된 한옥 주택을 양조장으로 개조했다. 한종진 대표, 그리고 3년 전 결혼한 아내 김현지씨가 수줍은 웃음 띠며 기자를 맞이했다.
먼저 양조장 시설을 둘러봤다. 숙성탱크에는 보라색 막걸리가 가득이다. 영동 캠벨포도를 부재료로 한 해질녘 막걸리다. 쌀은 강화섬쌀을 사용했고, 전통누룩을 넣었다. 포도 외에 다크체리도 넣었다. 37일간의 발효가 막 끝나 다시 일주일간 숙성을 거치고 있는 단계다. 자동교반 장치를 해서 하루에 10분간 술을 섞어준다.
“지금 있는 술은 영동 캠벨 포도를 넣은 겁니다. 영동 캠벨 말고, 상주 캠벨, 대부도 캠벨 포도로도 같은 이름의 막걸리 ‘해질녘’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같은 포도품종이지만, 지역이 다른 만큼 미세하게나마 맛과 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한종진 대표)
80L(리터) 용량의 탱크 한 배치로 만들 수 있는 술은 100병 정도. 그래서 해질녘은 300병 한정 생산할 예정이다. 자동 교반기를 설치한 이유는 일정한 술맛을 위해서다. 골고루 술을 섞어주지 않으면, 병입할 때 처음에 따른 술과 맨 마지막에 따른 술 맛에 꽤 차이가 난다고 한다. 발효 초기, 사흘간은 직접 손으로 저어준다고 한다. 공기를 잘 통하게 해, 효모증식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교반기는 발효가 끝난 숙성 공정에서만 가동한다.
멥쌀은 강화섬쌀을 쓰지만, 찹쌀은 남원쌀을 쓴다. 그러나, 찹쌀 함유량은 많지 않다. 단맛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서다. 찹쌀은 멥쌀보다 단맛이 더 난다. 한 대표는 “막걸리도 화이트와인처럼, 단맛 없이도 충분히 입안에서 적당한 산미를 느끼면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동의할 사람은 아직 많지 않을 것이다. ‘달짝지근한 막걸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한종진-김현지 부부는 국내 대표적 양조 교육기관인 막걸리학교에서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작년 1월에 서울 문래동에 ‘현지날씨’라는 이름의 전통주 바틀샵을 냈다. 지금은 서울과 수도권에 전통주 바틀샵이 20여개나 되지만, 현지날씨가 들어설 때만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일년만인 올 1월에는 바틀샵 인근에 ‘날씨양조장’을 차렸다. 바틀샵은 올 9월에, 전통주를 가벼운 안주와 함께 마시는 ‘바’로 바꾸었다.
-양조장 이름을 날씨양조장이라 지은 이유는?
“사람들이 늘 같은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또 사람마다 마시는 술도 천양지차다. 비오는 날은 막걸리가 당기는 사람도 있고, 소주를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우울한 날은 소주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분위기 잡고 싶을 때 와인을 찾는 사람도 있고. 기분에 따라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느낌이 달라진다.
그밖에 지역이나 날씨에 따라서 자라는 작물도 다르고 추구하는 음식들도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술도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계절이 뚜렷한 편이고, 계절에 따른 농작물도 다양하다. 지역의 특산물로 만든 음식도 각양각색이니, 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약, 천차만별인 음식을 맨날 같은 술과 먹는다면 금방 그 술은 질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분, 떼루아(지역성), 날씨, 계절, 감정의 폭에 따라 다양한 맛의 술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시기도 달라질 것이다. 날씨, 계절에 따라 달리 마시고 싶은 술들을 계속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양조장 이름에 담았다.”
날씨양조장이 현재까지 내놓은 술은 7종에 달한다. 기본적으로 계절 한정 생산이라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술들도 있다. 한 대표의 설명을 참조해 제품들을 소개한다. 봄 막걸리부터 계절 순서대로 소개한다.
▲봄비: 날씨양조장의 첫작품. 봄에 마시는 막걸리. 알코올도수는 9도. 한라봉과 귤 말린 껍질을 사용. 부드러운 산미가 특징. 약간의 청량감, 탄산이 있다. 부르고뉴 유리병을 사용해, 지금은 탄산을 좀 줄였다. 뚜껑이 터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식전주로 좋다.
▲오로라: 카카오, 후추, 계피를 넣은 술. 간절기 술(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놓는 술). 식후 디저트용 막걸리. 티라미수, 초코칩, 인절미 등에 잘 어울린다. 제철 과일로 만든 술이 지나갈 때 그 사이사이에 파는 술. 코코아의 단향이 나긴 하지만, 마시면 단맛이 거의 안난다. 단향은 있지만, 단맛은 없다는 얘기다. 끈적한 단맛은 없지만, 향으로 즐기는 막걸리다. 두터운 바디감이 있다.
▲여름바다: 수박과 블러드오렌지(속이 빨간 오렌지)가 들어간 술. 7.5도. 가볍게 마시는 술. 식전주 용도로 만든 막걸리. 수박 향이 난다. 수박 껍질 말고 과육만 넣었지만, 발효되면서 수박이 갖고 있는 시원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람빅계열의 향이 난다. 단맛이 워낙 적은데다 신맛이 강해 사람마다 호불호가 강하게 나뉜다. 여름 술이라 도수를 낮추었다.
▲열대야: 본격적으로 음식과 같이 먹는 술로 만들었다. 망고, 레몬을 넣었다. 9도. 산미가 있긴 하지만, 풀내음, 허브향을 느낄 수 있다. 이 술 역시 호불호가 있다. 여름술 2종은 다 ‘호불호’가 있다.
▲소나기: 농촌진흥청 원예특작과 요청으로 자두살구(플럼코트) 사용. 100병 한정 소량 생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나서 1시간만에 다 팔렸다. 산미가 있는 편.
▲신기루: 부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순곡주다. 오로라처럼 간절기 술. 12도. 소매가 2만3000원. 부재료가 들어간 술과는 공법에 차이가 있다. 부재료가 들어간 술들은 쌀이 튀면(개성이 강하면) 안된다. 신기루는 순곡주이기 때문에 곡물향을 더 내야 한다. 그래서 찹쌀 양이 좀 더 많다. 그럼에도 당도가 강한 편은 아니다. 평양냉면 수준의 슴슴한 맛. 드라이하다.
▲해질녘: 소매가 2만5000원. 포도, 체리가 들어갔다. 포도에서 나온 단맛이 상큼하다. 1차 영동 캠벨, 2차 상주 캠벨, 3차 대부도 캠벨 포도 사용. 같은 캠벨 품종이지만 지역(떼루와)을 달리했다. 부재료 원산지를 달리한 3종의 해질녘이 있다. 3가지 지역의 캠벨로 만든 술이다.
-이중 시장 반응이 가장 좋은 술 두가지를 꼽는다면?
“워낙 소량생산이라, 출시되자마자 다 팔린다. 그래서 뭐가 더 인기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개인적인 선호도로 봤을 때는, 봄비에 가장 애착을 느낀다. 첫작품이기도 하고, 애정이 많이 간다. 두번째로는 해질녘을 꼽고 싶다.”
-단맛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당도를 높이고, 효모증식을 위해서 프리미엄 막걸리 업체들이 많이 노력하는 것이 떡 형태로 밑술을 빚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구멍떡 혹은 백설기 등등. 혹은 밑술로 죽을 쑤기도 한다. 우리는 오로지 고두밥으로 밑술과 덧술을 만든다. 고두밥은 상대적으로 단맛이 가장 덜 나는 형태다. 찹쌀도 소량만 사용한다.
발효 도중에 알코올을 만드는 게 효모다. 이 효모는 고두밥(당분)을 먹는 속도가 떡 밑술보다 느리다. 천천히 먹는다. 그렇게 되면 발효가 더디게 진행된다. 발효가 오래 걸리면, 산미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효모가 사멸하면서 생기는 산미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두밥은 떡 형태와 달리, 당화발효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당화발효가 천천히 일어난다. 당분이 많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효모가 잘 먹게 해주려면 밑술이나 덧술을 죽이나 떡 형태로 주어야하는데, 고두밥으로 주면 더디게 먹는다. 그래서 당분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서 발효기간(37일)이 다른 술보다 매우 길다. 일반막걸리들은 효모도 쓰기 때문에 7~10일이면 발효가 끝난다. 맥주도 대개 2주면 끝난다.”
-숙성(7일)은 짧은 편 아닌가?
“부재료로 과육을 쓰기 때문에 숙성을 오래 하면 군내가 생긴다. 그래서, 과실이 들어간 막걸리는 숙성을 오래할 수 없다. 과육에는 어느 정도 당분이 있다보니 숙성기간이 길 경우, 효모가 과육의 당분과 향들을 잡아먹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부재료인 과일의 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숙성은 짧게 하는 편이다.”
-개성있는 막걸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 말고도 프리미엄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들이 아주 많다. 유투브를 보면, 전통주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아졌다. 나보다 10년 먼저 전통주 양조를 시작한 선배들이 적지 않다. 상업적인 막걸리보다는 시장에 도전하는 술을 빚는 선배들이 많다. 특히 신생 양조장들이 기존 막걸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일률적으로 단맛 나는 막걸리만 시중에 유통되다보니 막걸리의 다양성이 없어졌다. 이런 부분에 반기를 든 것이다. 막걸리의 스펙트럼을 더 넓혀보고 싶었다. 막걸리도 충분히 비싸게 즐길 수 있다고 여긴다. ‘파전에 어울리는 술이 막걸리’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바틀샵 운영이 제품 개발에 어떤 도움이 됐나?
“제품 디자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기존 막걸리와는 시각적으로, 디자인 측면에서 다른 술을 만들고 싶었다. 술에 대한 이미지를 확 바꿀 수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바 운영을 통해 하게 됐다. 부르고뉴 스타일의 유리병을 막걸리에 쓴 것이나, 막걸리 병 뚜껑에 샴페인처럼 와이어를 사용한 것도 우리가 처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술을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술 외관을 보고 술을 고르기가 쉽다. 가격도 디자인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술맛을 보지 않고 사는 상황에서는 디자인이 가격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 첫 구매에는 외관 디자인이 영향을 미치고, 재구매율이 높으려면 맛이 좋아야 한다.
우선은 디자인이 좋아야 하지만, 디자인에 어울리는 술맛이 따라줘야 그 술이 지속적으로 잘 팔린다. 우리가 추구하는 개성적인 술이 만약 플라스틱, 페트병에 담겨졌더라면 아마 소비가 안됐을 것이다. 개성이 강한 술은 디자인(술 용기)도 개성이 강해야, 소비자에게 먹힌다.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운 유리병을 사용했더라도, 흔한 6도 막걸리, 감미료 넣은 막걸리를 내용물로 담았다면, 이 또한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는 얘기다. 술 디자인, 술의 향과 맛을 같은 선상에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앞으로 만들 술은?
“딸기, 바나나 들어간 겨울술을 만들 예정이다. 또, 저도수의 순곡주 스타일 신상품도 준비 중이다. 알코올 도수는 5도 이하로 생각하고 있다. 용량은 350ml. 맥주는 사람들이 밖에서도 즐겨 마시는데, 막걸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이 음료수 마시듯, 맥주 마시듯 즐길 수 있는 막걸리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