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미나 페르호넨의 창업주 미나가와 아키라가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전시장에 있던 고객의 옷을 소개하고 있다. /김은영 기자

“입는 사람도, 제공하는(만드는) 사람도 행복한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디자인이란 사용자와 제작자 모두가 좋아야 합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한 전시장에 들어서자 흰 벽을 가득 매운 옷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총 303벌의 옷은 한 계절의 컬렉션이 아닌 하나의 브랜드가 30년간 천천히 발표해 온 것들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뒤섞였지만 모두 이질감 없이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을 초월해 오래 입는 옷, 바로 미나 페르호넨의 철학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본인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57)가 1995년 창업한 미나 페르호넨은 텍스타일(원단)을 기반으로 패션, 식기, 가구, 인테리어 소품 등을 만드는 브랜드다. ‘일상 속 특별함’을 콘셉트로 직접 손으로 그린 도안으로 원단을 제작하고, 일본 봉제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장인 정신을 고수한다.

어릴 적 육상선수를 꿈꿨던 미나가와 아키라는 부상을 입은 후 우연한 기회에 패션의 길로 들어섰다. 낮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문화복장학원에 다니며 사업의 기본기를 익혔다. 창업 초 사업이 어려워 어시장에서 일했을 땐 참치를 해체하며 원단을 남김없이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미나 페르호넨을 대표하는 디자인은 2000년에 선보인 원형 점 문양의 ‘탬버린(Tambourine)’이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점 25개를 자수로 놓아 만든 원형 도안으로, 지금까지 640종이 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얼핏 보면 단순히 원이 나열된 것 같지만, 하나의 원을 자수하는데 9분 37초의 시간이 걸리고, 이런 원이 6760개가 들어가야 원단 한 롤을 만들 수 있다.

지난 12일부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전시 중인 미나 페르호넨의 옷들. 30여년간 미나 페르호넨이 출품한 옷 303벌이 한 곳에 전시돼 있다. /이음해시테그 제공

느린 공정 탓에 1년에 겨우 200종의 제품을 만들고, 가격도 비싼 편에 속한다. 그러나 노스페이스, 레페토, 컨버스, 포터 등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덴마크 가구 회사 프리츠 한센, 프랑스 무쇠 냄비 브랜드 스타우브 등과 협업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일본에 15개 직영 매장을 두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20개 점포에서 판매 중이다.

조선비즈는 국내 전시를 앞두고 방한한 미나가와 아키라 미나 페르호넨 창업주를 만나 브랜드 철학을 들어봤다. 미나 페르호넨은 이달 12일부터 내년 2월까지 DDP에서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 전시를 연다. 일본에서 시작해 대만, 스웨덴을 거쳐 한국서 여는 마지막 전시다.

다음은 미나가와 아키라와의 일문일답.

—미나 페르호넨은 어떤 브랜드인가.

“브랜드명은 핀란드어로 ‘나’를 의미하는 ‘미나’와 ‘나비’를 뜻하는 페르호넨’을 합쳐 만들었다.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와 같이 디자인을 경쾌하게 만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일상 속 특별함을 콘셉트로 옷과 생활용품을 만든다.

보통 일상에서 입는 옷이라고 하면 심플(단순)하거나 편한 옷을 찾지 않나? 하지만 일상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다. 긴 시간 동안 옷을 입으면서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옷을 만들고 있다. 모든 작업은 소재를 가능한 한 남김없이 활용하고, 제작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손으로 직접 원단 도안을 그리고, 일본에서 생산하는 ‘슬로우 패션’ 방식을 채택했다. 패스트 패션이 선망받는 시대, 기존의 패션 문법과 다른 사업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995년 창업할 당시 일본에서는 임금이 싼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내가 일했던 공장 역시 상황이 열악해졌는데, 이를 보며 어떤 제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좋은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패션 브랜드는 화려하지만, 옷을 만드는 공장은 너무 힘들다. 그러한 관계를 평등한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 편리하고, 그것을 착용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만드는 사람 역시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어 손작업을 고수한다. 싼 제품을 대량 생산하면 만드는 사람은 대가를 적게 받는데, 우리는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의 생활이 풍족해지도록 한다.”

미나 페르호넨의 대표 디자인인 '탬버린(Tambourine)'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 2000년 선보인 탬버린은 현재까지 640종 이상의 디자인이 출시됐다. /김은영 기자

—‘행복한 옷’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 영감은 어디서 얻나.

“브랜드 콘셉트처럼 일상생활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찾는다. 일상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공장 기술자들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실현할 지를 협의해 만든다. 해외에 공장이 있다면 이런 작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원피스를 입으면 항상 칭찬을 받았습니다... 결혼하고 임신을 했을 때도 이 원피스는 조용히 제 배와 아기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그녀(딸)가 이 원피스를 입을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18년간 미나 페르호넨의 원피스를 입은 고객의 사연

—고객들의 옷과 사연을 전시한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어른이 되면 물려 입겠다며 엄마에게 ‘원피스를 너무 많이 입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딸의 사연도 있었는데, 연령과 세대 구분 없이 사랑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객들에게 추억이 담긴 옷과 사연을 받아 전시 공간을 꾸렸다. 미나 페르호넨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색이 바래기보다는 애착이 깊어지는 디자인을 추구한다. 짧은 기간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길게 입을 수 있는 그런 옷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100년이 지나도 좋은 옷’을 만든다고 했다. 오래 가는 옷을 만드는 방법은.

“고객들이 ‘오래 사용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좋은 디자인의 제품을 꾸준히 출시하는 것. 품질이 떨어지지 않게 공장 설비를 유지하고, 제품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것이 브랜드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옷은 천으로 만들기 때문에 오래 입으면 낡아지고, 입는 도중에 찢어질 수도 있다. 또 입는 사람의 체형이 바뀌면 입지 못하게 된다. 이에 우리는 회사에 리폼(Reform·개선) 전담팀을 두고, 고객이 옷을 리폼해 오래 입도록 돕는다. 단순히 수선하는 수준을 넘어 고객과 협의해 새로운 디자인으로 고쳐준다.”

미나 페르호넨과 협업한 헬리 한센(왼쪽)과 포터. /각 브랜드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협업의 기준은 무엇인가.

“스타우드 냄비의 경우 원래 뚜껑에 문양이 없지만, ‘바다의 생명을 요리한다’는 의미로 물고기와 해초 등의 문양을 넣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걸 상대방 회사가 갖고 있을 때, 또 상대방 회사에서 갖고 있지 않은 걸 우리가 갖고 있을 때 협업을 진행한다. 서로의 힘을 발휘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협업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한국 작가들과 협업했는데, 준비 과정에서 한국에 자주 나와 작가들과 대화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문승지 작가와는 원단을 모두 사용하고자 하는 미나 페르호넨의 디자인 철학을 담았다. 자투리 없이 모든 천을 활용해 하나의 의자를 완성했다.”

—디지털 기반의 패스트 패션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패스트 패션이나 디지털로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제품의 사이클(주기, 생산-구매-사용-폐기)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이 길게 사용할 수 있는 주기를 만들어야만, 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짧은 사이클을 변화시켜야 한다.”

—향후 계획은.

“처음 회사를 만들면서 결심했던 ‘100년 가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내년에 창립 30년을 맞는데, 회사의 규모나 숫자를 늘리기보다 환경과 산업을 지키면서 오래 가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한국에도 우리의 창작물이나 철학을 알리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앞으로 6개월간 전시를 하는데 잘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