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일본의 운동화 브랜드 아식스(ASICS)가 ‘힙’하게 부활했다. 아식스는 그간 디자인보다는 기능에 충실해 ‘아저씨 신발’ ‘체대생 운동화’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을 계기로 러닝의 인기가 높아진 상황에서 ‘고프코어’와 ‘Y2K’ 스타일이 1020 세대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아식스에 다시 조명이 비쳤다. 아식스도 예스러움을 벗고 스타일리시함을 입었다. 그러자 2000년대 모델을 재해석해 출시한 제품을 필두로 러닝화 판매가 급증했고, 오랫동안 주춤했던 매출도 다시 상승세를 탔다.

나이키보다 앞선 75년 전통 기업

아식스는 1949년 일본 운동화 산업단지가 있는 고베에서 오니츠카 기하치로가 창업했다. ‘ASICS’는 라틴어 ‘Anima Sana In Cor-pore Sano(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을 따와 지었다. 아식스는 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한 ‘Sound Mind Sound Body’를 브랜드 슬로건으로 쓰고 있다.

슬램덩크 ‘정대만 농구화’로 유명한 아식스 젤 PTG MT. 사진 아식스

아식스는 ‘오니츠카 타이거(Onitsuka Ti-ger)’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첫 제품은 농구화였다. 당시 농구화는 가장 제조하기 까다로운 신발로 여겨졌지만, 창업자는 “처음에 높은 관문을 넘을 수 있다면 다른 관문도 계속해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의 첫 번째 농구화는 1950년 베일을 벗었다. 이후 1983년 출시된 농구화(젤 PTG MT)는 만화책 원작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정대만 농구화’로도 유명하다. 이 모델은 국내 리셀(resell·재판매) 시장에서 발매 가격의 세 배에 달하는 약 25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오니츠카 타이거(지금의 아식스)가 1953년 선보인 최초의 러닝화. 사진 아식스

오니츠카 타이거(지금의 아식스)가 러닝화 시장을 발굴한 건 1953년이다. 스포츠 선수를 대상으로 한 마라톤화를 선보였다. 오니츠카 타이거는 지속적인 소재 개발로 1960년 ‘매직 러너’ 마라톤화를 출시했는데, 이를 계기로 오니츠카 타이거는 ‘운동화 명가’로 자리 잡았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에티오피아, 1960·1964년 올림픽 금메달)를 비롯해 배질 히틀리(영국, 1964년 국제마라톤 은메달), 츠부라야 고키치(일본, 1964년 국제마라톤 은메달), 키미하라 켄지(일본, 1968년 국제마라톤 은메달) 등 스타 선수들이 매직 러너를 택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아식스는 ‘나이키’라는 암초를 만나게 된다. 나이키의 전신은 오니츠카 타이거 제품을 미국에 독점 유통하던 ‘블루 리본 스포츠(BRS)’다. BRS는 단순 유통을 넘어 1971년 미국에서 자체 브랜드(나이키)를 탄생시켰다. 나이키는 빠르게 성장했다. 오니츠카 타이거는 1977년 스포츠 의류 브랜드와 합병해 종합 스포츠 브랜드(아식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나이키만큼의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엔 실패했다. 결국 아식스는 꽤 오랫동안 트렌디한 패션 브랜드라기보단 운동선수가 선호하는 기능성 제품 브랜드로 자리하게 됐다.

레드벨벳 멤버 슬기의 사복 패션에 등장한 아식스 젤 시리즈 러닝화. 사진 슬기 인스타그램

‘기능성’ ‘힙스터’로 제2 전성기

트렌디함은 후발 주자에게 밀렸지만, 1970년대 조깅 열풍에 이은 최근의 러닝 열풍은 ‘러닝화 명가’ 아식스에 기회가 됐다. 회사에 따르면 올해 파리 마라톤 남녀 우승자를 포함한 완주자 5만4000명 넷 중 한 명은 아식스 러닝화를 착용했다. 미츠유키 토미나가 아식스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지난 5월 외신 인터뷰에서 러닝 분야 사업을 더 키워나가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는 이 분야 투자를 두 배로 늘리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며, 고객이 외부 서비스와 경험을 누리게 하는 등 “러닝 생태계에서의 더 큰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식스는 시야를 넓혀 패션 시장을 두드렸다. 아식스는 오니츠카 타이거 브랜드를 상위 브랜드로 부활시켰고, 아식스 타이거도 2015년 새로 선보였다. 아식스가 기능에 초점을 맞춰 운동선수를 타깃으로 삼았다면, 오니츠카 타이거는 패션에 초점을 맞췄다. 아식스 타이거는 이 두 브랜드의 중간 성격이다. 아식스는 또 2018년 세계적인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와 협업해 고프코어 스타일의 패션 스니커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이 2020년대다. 국내에서 역시 ‘젤’ 시리즈 등 인기 제품이 출시되자마자 동나는 ‘대란’이 일어나도 했다. ‘젤 카야노 14’ ‘젤 1130’ ‘젤 1090’ 등은 2000년대 초반 모델을 재해석해 새롭게 출시한 러닝화 제품이다.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프코어와 Y2K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1020 세대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식스는 지난해 운동화 리셀 플랫폼인 스톡 X(Stock X)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거래된 브랜드다. 2022년 10위에서 다섯 계단 올랐다. 국내 리셀 플랫폼에서도 17만원 안팎인 발매 가격보다 5만~10만원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아식스는 온라인 쇼핑에 익숙한 1020 세대를 겨냥해 유통 전략도 전면 수정했다. 온라인 채널에 힘을 주고 백화점 등 오프라인 매장을 과감히 정리했다. 국내 200개에 달했던 매장은 현재 서울 강남 직영점 1곳을 비롯해 총 28곳밖에 남지 않았다. 특히 1020 세대의 접근성이 낮은 백화점 매장은 모두 철수했다.

자료 S&P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

부진 딛고 3년 새 매출 73% 뛰어

실적은 빠르게 개선됐다. 아식스 연간 매출액은 코로나19 이전까지 3700억~4000억엔(약 3조2190억~3조4800억원)에 그쳤다. 2020년엔 3288억엔(약 2조8606억원)으로 감소한 뒤 이듬해 4041억엔(약 3조5157억원)으로 회복하고 2022년 4846억엔(약 4조2160억원), 2023년 5705억엔(약 4조9634억원)으로 매년 17% 이상씩 성장했다. 3년간 성장률은 73%에 달한다. 특히 지난해 운동화 카테고리는 러닝과 비(非)러닝 부문 모두 전년 대비 30% 넘는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상위 브랜드인 오니츠카 타이거 매출도 전년 보다 40%가량 늘어 603억엔(약 5246억원)을 기록했다. 아식스는 올해 5900억엔(약 5조1330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회사는 의류·장비를 제외한 모든 카테고리에서 매출액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식스는 “대외 불확실성이 있지만, 러닝화 매출과 오니츠카 타이거 브랜드의 성장을 필두로 한 매출액, 영업이익 증대를 기대한다”고 야후파이낸스에 전했다.

아식스는 이런 성장세에 힘입어 북미, 유럽, 중화권 시장점유율을 더 끌어올릴 계획이다. 아식스는 북미 러닝화 시장점유율이 9%(2022년 기준)로 매우 낮은 편이었는데, 이를 2026년까지 25%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유럽에선 지난해 25%였던 점유율을 2026년 29%까지 높일 예정이며, 중화권에서는 800억엔(약 6960억원)에 못 미치던 연간 매출을 2026년까지 1200억엔(약 1조440억원)으로 늘릴 방침이다. 아식스가 제시한 2026년 전체 매출 목표액은 7000억엔(약 6조900억원)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