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기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

김웅기(73)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은 은퇴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철저히 기업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에게 ‘은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김 회장은 글로벌 섬유 패션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서른다섯에 퇴사하고 1986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글로벌세아의 모태인 세아상역(당시 세아교역)을 창업해 세계 최대 규모의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별생산(ODM) 기업으로 일궜다. 이 회사의 하루 평균 생산량은 250만 벌로, 미국 대형 유통사인 월마트, 타겟, 콜스, 갭 등에 수출한다.

또 나산(현 인디에프(014990)), 쌍용건설, 태림페이퍼, 발맥스기술, 세아STX엔테크, 전주페이퍼 등을 인수·합병(M&A)해 지난해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글로벌세아는 2025년까지 매출 10조원, 영업이익 1조원 달성을 목표로 한다.

‘플라잉 맨(Flying Man)’이라는 별명처럼 김 회장은 바쁠 때면 1년에 24일을 비행기에서 보냈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해외 출장이 잦다. 그는 출장길 불 꺼진 기내에서 틈틈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한 글을 모아 지난달 경영 에세이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를 펴냈다.

‘남들이 걷고 뛸 때 나는 늘 지구 위 어딘가를 날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과테말라, 니카라과, 아이티, 코스타리카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일궈 온 그의 도전의 순간들이 담겼다.

김웅기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세아빌딩 본사에서 만난 김 회장은 책 속 문장처럼 담담하고 담백한 말투로 출간 소회(所懷)를 밝혔다.

“과거를 모르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현대를 사는 청소년과 미래의 젊은 창업자들에게 38년 전의 창업과 경영에 대해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더 값진 미래를 설계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그가 세상을 탐험하며 깨달은 사실은 단 하나,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껴본 사람만이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만난 세상은 온통 보물로 가득했다.

조선비즈는 김 회장의 경영철학을 관통하는 도전 정신과 신뢰,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도전 : 본 만큼, 아는 만큼, 거둔다

세아상역은 창업 후 38년간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지속 성장해 왔다. 외환 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도 비껴갔다. 김 회장이 변함없이 지켜온 원칙은 ‘도전정신’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창업했을 때도, 낯선 대륙에 진출할 때도, 모두가 망한 사업에 후발주자로 나설 때도 도전정신으로 뜻을 밀고 나갔다.

1995년 해외 생산기지 구축의 발판이 된 사이판에 진출할 땐 모두가 안 된다며 말렸다. 이미 현지엔 34개의 공장이 있었고, 그들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며 사업을 접던 중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자동화 설비를 갖춘 새 공장을 짓고, 숙련된 인력으로 생산성을 높여 ‘제2의 창업’을 일궜다.

이후 진출한 과테말라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국계 공장들은 경쟁력이 떨어졌다며 철수하는 분위기였지만, 후발주자인 세아가 들어오고 나서 분위기가 반전됐고 과테말라는 의류 수출 전성기를 맞았다.

김웅기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오른쪽)이 2012년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에게 아이티 공장을 소개하고 있다. /글로벌세아

김 회장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바람개비를 돌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농사를 짓는 천수답(天水畓) 경영이 아닌, 주변의 모든 용수를 이용하는 수리답(水利畓) 경영이라야 기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회장은 “후발기업들은 선발기업들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해 답습하지 않으면 단기간 내 성공할 확률이 높다”면서 “모든 기업은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므로 경영자는 좁은 길은 넓히고 막힌 길은 뚫어야 할 책임이 있다. 경영자가 그런 각오로 경영에 임해야만 회사가 정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세아상역으로 의류 OEM·ODM 1위 기업이 된 후엔 M&A를 통해 이종 업종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전 세계를 누빈 그도 M&A를 앞두고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수면 중에도 의식의 절반은 깨어 M&A에 골몰했다. 하지만 김 회장에게 현상 유지는 곧 퇴보를 의미했다.

그는 “시간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죽거나 우주로 사라질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라며 “현상 유지는 안정이 아니라 쇠락의 시작이다. 매출과 영업이익, 창조적인 사고와 혁신이 성장을 멈추는 순간 추락은 시작된다. 향후 성장을 다시 하더라도 도태기의 상흔은 어떤 형태로든 회사에 남아 있게 된다”라고 했다.

실제 2020년 인수한 태림페이퍼는 코로나 여파로 온라인 쇼핑이 크게 늘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이 지속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전주페이퍼 인수 계약을 체결해 국내 제지 시장에서 선두 체제를 굳혔다. 쌍용건설은 인수 4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세아에게 이종 업종 진출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2020년 글로벌세아 그룹이 인수한 태림포장 공장 내부. /글로벌세아

◇신뢰 : 전세기 띄워 맞춘 납기… 신뢰는 생명

도전정신과 함께 김 회장이 강조한 리더십은 신뢰다. 그는 납기를 목숨처럼 지켰다. 창업 초엔 파란 포니 엑셀을 끌고 전국의 원단 공장과 염색 공장을 누볐고, LA 항만 노조 파업 때는 전세기를 띄워 납기를 지켰다. 덕분에 세계 시장에서 세아에 대한 신뢰는 더 커졌다.

코로나19 위기를 넘긴 것도 오랜 기간 쌓은 인연과의 신뢰가 바탕이 됐다. 당시 미 연방정부는 국민들에게 의료용 방호복과 마스크를 지급하기 위해 자국 회사들을 상대로 입찰을 진행했다.

세아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미국 방적 회사 파크데일을 통해 마스크와 방호복 수주에 참여했다. 코로나로 거래처들의 주문이 급감했지만, 세아상역은 방호복 3000만 장, 마스크 2억 장의 주문을 수주했고, 그 결과 2020년 매출과 영업이익이 팬데믹 이전보다 증가했다.

김 회장은 당시 세아상역이 마스크와 방호복을 대량으로 수주할 수 있었던 건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창안한 아이티 재건 사업에 참여한 이력 덕분이라 회고했다. 세아상역은 2011년부터 미국 국무부, 미주개발은행, 아이티 정부와 함께 추진 중인 카라콜 산업단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김 회장을 ‘체어맨’이라 부르는 힐러리 전 국무장관은 2005년 부산 에이펙 총회 기조연설에서 세아상역의 아이티 투자를 ‘무역을 통한 원조’라고 소개했다.

카라콜 프로젝트는 공단과 발전소, 항구, 도로, 주택 5000채를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세아는 2만 명을 고용할 수 있는 공장을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기계 설비를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아이티 세아학교는 첫 고교졸업생을 배출했다.

2014년 3월 아이티 세아학교 오픈식. /글로벌세아

김 회장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 추구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며 “어려운 국가와 국민을 돕는 인류애를 목적으로 형성된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된다”라고 강조했다.

임직원들과의 신뢰도 중요하다. 그는 임직원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업계 최고의 보상으로 자긍심을 높였다. 세아상역은 가장 많을 때는 부서별로 1000%가 넘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세아가 추구하는 인재는 전문성과 인성을 겸비한 사람이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혁신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항상 내일의 변화를 준비하고 창조적인 사고로 최고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김 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며 “내가 생각하는 인재경영은 로열티와 경청, 혁신전략과 도전정신을 가진 인재를 경영자의 주변에 두고, 경영자는 회사와 임직원들을 위한 희생정신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꿈 : 희망을 현실로 이끄는 이정표

김 회장은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한국 미술품 중 역대 최고가인 김환기 작가의 작품 ‘우주’를 132억원(2019년 낙찰 당시 환율)에 낙찰받아 세계 2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렸다. 사옥 내 자체 갤러리를 운영하고 무료로 전시회도 연다. 미술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의 취미이자, 사회 환원을 위한 수단이다.

김웅기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의 경영 에세이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 /쌤앤파커스

아이티 재건 사업으로 인연을 맺은 할리우드 배우 숀 펜과는 영화 제작을 꿈꾸고 있다. 숀 펜은 과거 김 회장이 아이티 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영화를 제작하면, 개런티를 1달러만 받고 출연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김 회장은 “나는 몽상가다. 혼자 있는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고, 생각의 열매들은 언젠가 실현됐다”면서 “아이티 관련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관련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언젠가는 숀 펜이 출연하는 영화 제작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었을 적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경영 에세이를 감명 깊게 읽었다. 이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기업가의 본분이고, 도전과 창조의 길이 바로 기업가의 길이라고 깨달았다.

김 회장은 청년들에게도 도전과 꿈을 강조했다. 그는 “직장생활이든 사업이든 혁신전략에 항상 목말라하고 끊임없이 용기 있게 도전해야 한다”라며 “도전은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사다리”라고 조언했다.

그의 사전에 은퇴라는 단어는 없다. 경영자라면 머릿속에 현재에 대한 생각이 50%, 미래에 대한 생각이 50%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그의 시선은 아프리카로 향한다.

김 회장은 “앞서 가나와 탄자니아, 케냐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현재 쌍용건설은 아프리카 적도 기니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나에게 있어 아프리카는 꿈과 희망의 대륙이다. 사업의 아이템과 기회가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