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스(Flex) 문화’의 유행으로 사세가 약화했던 제조·유통 일원화(SPA) 패션이 고물가 시대를 맞아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SPA 브랜드는 유행하는 옷을 빠르고 저렴하게 선보여 급성장했지만,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과 함께 플렉스 문화가 부상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2019년부터 10~20대 사이에서 유행한 플렉스는 로고가 큰 옷이나 명품을 입은 모습을 소셜미디어(SNS) 등에서 과시하는 문화로, 명품과 고가 브랜드의 소비를 주도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해당 유행이 주춤해 지고,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절약형 소비처로 다시 살아나는 추세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에프알엘코리아는 2022 회계연도(2022년 9월~2023 8월) 매출이 9219억원으로 전년 대비 31% 증가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412억원으로 23%가 늘었다. 순이익은 43% 증가한 1272억원을 기록했다.

그래픽=정서희

2005년 국내에 진출한 유니클로는 2015년 매출 1조원을 돌파한 후 2019년 매출이 1조4000억원까지 불어났지만, 그해 7월 일본 정부의 한국 반도체 수출 규제 조치 이후 불어닥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의 여파로 이듬해 매출이 6300억원 수준으로 반토막 나고 영업이익도 적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2022년부터 실적이 회복되며 다시 매출이 1조원에 근접했다. 불매 운동 이전 190개였던 매장 수를 130개 수준으로 줄이고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여서, 더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속옷부터 외투까지 기본형 의류를 취급하는 데다, 가성비가 높다는 점이 인기 이유로 지목된다.

신성통상(005390)의 SPA 브랜드 탑텐은 지난해 9000억원의 매출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젼넌 대비 15%가량 증가한 수치다. 탑텐의 매출은 2019년만 해도 2800억원 수준이었으나, 불매운동으로 유니클로가 주춤한 사이 가파른 성장을 보이며 업계 1, 2위를 다투게 됐다.

유니클로와 같이 기본형 의류를 취급하며, 성인, 아동, 운동복, 잡화 등 전 상품군을 다룬다. 매장 수는 680여 개로 SPA 브랜드 중 가장 오프라인 매장이 많다. 이중 아동 단독 매장은 300개에 달한다.

이랜드월드의 SPA 브랜드 스파오도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20%늘어난 4800억원을 기록했다. 발열 내의인 ‘웜테크’의 경우 1만5900원에서 1만2900원으로 가격을 인하한 결과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352% 증가했다. 또 라이트 재킷(297%), 플리스(42%), 푸퍼 패딩 점퍼(20%) 등의 좋은 반응을 얻으며 실적을 견인했다.

이 회사의 여성 SPA 브랜드 미쏘의 지난해 매출은 1300억원이었다. 스파오와 미쏘의 매출을 합치면 지난해 이랜드 SPA 매출은 6100억원 수준이다.

이랜드 관계자는 “스파오의 경우 2021년부터 온 가족이 즐기는 SPA 브랜드로 브랜드 콘셉트를 수정하고 기본 상품에 집중한 전략이 통한 것 같다”라며 “고물가 양극화 시대를 맞아 고객들이 다시 SPA 브랜드를 찾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스파오 매장 전경. /이랜드월드

삼성물산(028260) 패션부문의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 역시 지난해 매출이 3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2조510억원으로 2년 연속 2조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은 8%가량 증가한 1940억원으로 집계됐다. 회사 측은 자크뮈스, 스튜디오 니콜슨 등 ‘신명품’과 함께 에잇세컨즈가 실적을 견인했다고 설명했다.

2012년 출범한 에잇세컨즈는 10년 만인 2022년 손익분기점(BEP)을 달성한 후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매장을 수백 개씩 운영하는 경쟁 브랜드들과 달리 점포를 70개 수준으로 운영하며,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엔 프리미엄 라인을 출시해 감도와 디테일에 대한 고객 만족도를 높였다.

이 외에 글로벌 SPA 브랜드 자라는 2022 회계연도(2022년 2월~2023년 1월) 매출이 5552억원으로 전년 대비 9%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639억원으로 71% 늘었다. 같은 기간 H&M 운영사인 에이치앤엠헤네스앤모리츠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2%, 80% 증가한 3368억원, 166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SPA 패션 시장은 2005년 유니클로를 시작으로 자라(2008년), H&M(2010) 등 글로벌 브랜드가 진출하며 급성장했다. 초기엔 유행 상품을 빠르고 저렴하게 내놓는 ‘패스트 패션’으로 각광 받았으나, 최근의 인기 흐름은 패스트 패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고물가의 영향으로 패션 소비가 양극화하면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옷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높은 SPA 브랜드에서 구매하고, 외투나 가방, 신발 등은 고급 브랜드를 소비하는 현상이 두드러져 관련 브랜드들이 수혜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국내 1위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도 기본 의류를 제작·판매하는 자체 브랜드(PB) 무신사스탠다드를 SPA 브랜드로 포지셔닝해 백화점과 쇼핑몰로 유통망을 확대하고 있다. 무신사스탠다드의 2022년 매출은 1700억원 수준이었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SPA 브랜드 중에서도 유행하는 옷보다 다양한 연령층이 입을 수 있는 이너웨어, 니트, 바지 등을 많이 갖춘 브랜드들이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올해도 소비 침체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당분간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