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 이태원 개인작업실에서 신동민 작가의 '홍학 세 마리'를 설명중인 한젬마 러쉬코리아 부사장./이신혜 기자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개인 작업실. 이곳에서 만난 한젬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러쉬코리아 부사장)는 초록색 머리에 초록색 원피스, 초록색 코트, 여기에 초록색 부츠까지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으로 물들인 모습이었다.

그가 초록색으로 본인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2020년 강원키즈트리엔날레 예술 총감독을 맡았을 때부터다.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코로나19 여파로 홍보가 여의찮아 고심하던 한 디렉터는 그 길로 미용실에 달려가 초록색으로 염색부터 했다.

"그때 주제가 자연, 환경, 평화, 동심이었어요. 이걸 함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고 생각했고 저를 캔버스 삼아 홍보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미술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한 디렉터는 스스로를 '이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아트를 중심으로 꾸준히 외연을 넓히는 아트 비즈니스의 한가운데에 늘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과 미술관을 연결해 막연한 아트에 대한 두려움을 깨부수고, 예술과 발달장애 아동을 연결해 아이들의 재능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 국내 강소기업의 제품 디자인에 아트를 녹이는 방식으로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도 힘썼다.

그래서 한 디렉터를 알리는 수식어구도 여러 가지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 시절(1999년)부터 멀티아티스트(2012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2012~2018년)까지.

최근 러쉬코리아 부사장을 맡고 나서는 자신을 '부사장 아티스트'라고 칭하기로 했다. 부사장인 아티스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포부에서다.

최근 한 디렉터의 행보는 지금까지 걸어온 핵심 키워드가 총 망라돼 있다. 아트가 중심에 있고, 기업이 있고, 발달장애 작가를 중심으로 한 사회 환원 활동, 그리고 소비자도 있다.

한 디렉터는 "낯선 것을 이어서 새 의미를 만드는 것. 아트가 중심인 것이 내 삶 그 자체였고 그게 앞으로 아트와 기업이 나아갈 방향"이라고 했다.

한젬마 러쉬코리아 부사장 개인 작업실에 걸려있는 발달장애 작가들의 작품. /이신혜 기자

◇ 아트콜라보, 이젠 '노 리밋'로 바뀐다

한 디렉터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뜻하는 '아트 콜라보레이션(협업)'에 적극 힘쓴 국내 1세대 아티스트다. 한 디렉터가 말하는 아트 콜라보는 디자인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콘텐츠와 공간사이 협업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아트 콜라보는 점점 한계가 없는 단계로 가고 있어요. 이른바 '노 리밋'이죠"

처음 시작은 디자인 협업이었다. 명품 브랜드 '생로랑'을 만든 이브 생로랑이 20세기 추상화의 대표 작가인 몬드리안의 작품을 패션에 접목한 '몬드리안 오마주' 작품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은 1985년 미국 유통 담당자의 제안으로 앱솔루트 병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약병 같은 이미지의 앱솔루트 술병에서 영감을 받은 앤디 워홀은 '앱솔루트 워홀'이라는 콜라보 작품을 만들어냈다.

"앤디 워홀은 일찌감치 말했어요. 좋은 비즈니스가 가장 훌륭한 예술이라고. 대단한 천재죠."

한국에서는 2013년 LG아트센터에서 진행한 '레플리카' 공연에서 아트와 콘텐츠의 협업 사례가 나왔다. 이 공연은 크리에이터, 현대무용가, 사진작가, 국악 연주자, 발레리나, 성악과 학생들까지 다양한 콘텐츠가 협업한 공연이었다.

대중문화와 아트의 협업 사례도 있었다.

"비욘세와 제이 지가 공개한 'Apeshit' 뮤직비디오에서 루브르미술관 곳곳을 무대로 삼아 명작들의 패션과 포즈를 오마주한 장면도 아트와 콘텐츠의 콜라보에요."

지난해 러쉬코리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한 한 디렉터는 올 1월부터 러쉬코리아 부사장에 임명돼 기업과 아트의 콜라보 사례를 또 하나 만들고 있다.

러쉬 매장을 활용해 아트페어를 진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전국 각지의 러쉬 매장에서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발달장애 작가들을 연결했다.

고객들이 아트작품을 보다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러쉬 매장이 없는 지역은 호텔과 트리엔날레 개최 장소 등을 빌려 팝업(임시매장) 전시로 진행했다.

이 과정이 쉽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 디렉터가 10년째 발달장애 작가들의 재능을 발굴하며 이들의 작품이 러쉬코리아가 전하는 가치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연결했지만, 러쉬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발달장애 작가들을 '후원'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후원은 상대방을 낮출 수 있는 표현이라 오해의 소지도 있다는 점, 후원 활동을 마케팅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아트 콜라보가 결과만 보면 이어 붙이기만 한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사실 기업과 아트는 언어가 달라 쉽게 마주하기가 어려워요."

러쉬의 재활용 가능 포장 천(페브릭)을 펼쳐보인 한젬마 러쉬코리아 부사장. /이신혜 기자

이후 러쉬는 발달장애 작가들을 후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협업하고 상생하며 작품과 브랜드를 알리는 좋은 기회임을 인정했다. 한 디렉터가 진두지휘한 아트페어에서는 전시 기간 30여 개의 작품이 거래되기도 했다.

발달장애 작가들과의 협업은 올해도 계속된다. 이번에는 발을 넓혀 러쉬코리아, MCM, 토끼소주 등 브랜드와 함께한 발달장애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2월부터 서울 신사동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 기업과 아트의 만남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

기업은 왜 아트를 만나야 하는 걸까. 아트 콜라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얼까.

이에 대해 한 디렉터는 아트콜라보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 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이 트렌드를 쫓기 위해 준비하는 데엔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것도 아주 오래요. 발 빠르게 잘나가는 작가와 협업하거나 다른 브랜드와 협업하는 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갖추는 가장 빠른 길이예요. 그 시대에 잘나가는 작가들은 시대가 원하는 정신을 담고 있거든요."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출생)가 소비의 주축으로 떠오른 것도 주요 요인이다. 현재 아트시장은 전시장에서 시작되기보다는 SNS에서 시작해 작품 구매자나 관람객이 확보된 상태에서 갤러리 전시가 진행되는 순서로 이어진다.

"과거에 행사를 하면 관람객을 많이 모으는 것이 정말 중요했어요. 한 번만 시간 내서 와달라고 부탁할 때가 많았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갤러리가 열리면 꼭 불러달라는 요청도 많고, 심지어 고객 웨이팅리스트(대기명단)가 생길 정도예요. 소비자 가는 곳에 기업이 가야죠. 기업이 아트와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죠."

기업이 생산한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도 제격이다. 그는 '한젬마의 아트콜라보 수업'이라는 본인의 책에 썼던 기업과 아트의 협업 예시를 다시 한번 언급했다.

10만~20만원대의 비교적 저렴한 시계 브랜드인 '스와치'가 백남준 작가가 디자인한 에너지와 전기를 표현한 'Zapping(재핑)' 시계는 소더비 경매에서 5000달러(약 6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루이비통, 구찌, 디올 등 주요 명품 브랜드들이 짝퉁(가짜 상품)과 차별점을 두면서 작가들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아트 백을 내놓으면? 상품 가치가 자연스레 올라요. 수프림과 나이키 등 서로 다른 브랜드가 협업한 한정판을 만들고, 현대차와 커피빈이 서로의 공간을 공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한 디렉터는 당분간 러쉬에서 아트 콜라보 작업을 더 활발히 펼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음 협업 대상은 수목원이다. 환경, 초록색 등 러쉬가 추구하는 키워드에 맞게 러쉬 제품과 함께하는 작업을 구상 중이다.

"제가 당분간 '부사장 아티스트'로 살 거라고 했잖아요? 러쉬에서 한 바탕 놀아볼게요. 부사장이 아티스트라서, 아티스트가 부사장이라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어디까지일지 실험해 보려고요. 일단 러쉬 제품을 포장하는 페브릭(천)을 토끼 인형으로 바꿔 놓은 러쉬 토끼전부터 보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