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로레알그룹의 화장품 브랜드 키엘(Kiehl’s)이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출원한 상표권이 화장품 업계의 주목을 끌었다.
출원서에 따르면 이 상표권은 ‘가상 향수(virtual perfumery)’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에서 향수를 탐색·구매·판매·교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목적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 세대)의 소비시장 진입에 힘입어 화장품 업계에서도 디지털 전환 바람이 거세다.
그 대표주자인 로레알은 2018년 AR(증강현실) 기업 모디페이스를 인수한 뒤 가상 메이크업 서비스를 내놨다. 매장에 가보지 않고도 색조 화장품을 얼굴에 적용해 볼 수 있도록 한 데 이어 이제는 가상세계 속에서 화장품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37년 베테랑 향기 디자이너(fragranace designer) 레이먼드 매츠(Raymond Matts)를 지난 8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만났다. 그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메타버스에서 향을 맡을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적인 향료 회사 퍼미니쉬(Firmenich)와 IFF, 화장품 브랜드 엘리자베스 아덴, 에스티로더 등을 거친 매츠는 현재 센서블 미디어(sensable media)란 회사와 손잡고 향을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 콘텐츠로 내보내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그는 “메타버스에 내가 만든 향수를 다시 선보일(relaunch) 예정”이라며 “컴퓨터 앞에 편안하게 앉아 메타버스에서 원하는 향수를 시향하고 주문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매츠는 세계적인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향수 화이트 다이아몬드와 에스티로더 산하 브랜드 크리니크의 베스트셀러 향수 ‘크리니크 해피’와 타미힐피거의 ‘타미T’, 아라미스의 ‘서피스’의 향기를 디자인했다.
그는 미국의 향기 마케팅 기업 프롤리텍과 함께 향기를 활용한 공간 마케팅에도 참여했다. 프롤리텍의 한국 에이전시 아이센트의 전속 향기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부티크 호텔 레스케이프와 패션 브랜드 아더에러, 스케처스 매장을 위한 향기 디자인에 참여했다.
다음은 매츠와의 일문일답.
-본인을 향기 디자이너(fragrance designer)라고 소개하는데, 조향사(perfumer)와는 어떻게 다른가.
“향기 디자이너는 향의 조제법(formula)을 만든다는 점에서 조향사와 다르다. 모든 노트(note·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향을 이르는 말)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이를 활용해 향을 제조한다. 직접 만든 제조법을 토대로 조향사를 이끌어 원하는 향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궁금하다.
“공간을 위한 향을 만든다면 그 공간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그 공간에 걸어 들어갈 때 어떤 감정을 느끼길 원하는지, 어떻게 해야 방문한 사람들이 계속 머물고 싶어할지 등을 고민한다.
브랜드의 향수라면 그 브랜드의 DNA는 뭔지, 주요 고객은 누군지, 그들이 향을 통해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 향수를 뿌린 사람들이 어떤 인상을 풍기고 싶어 하는지도 중요하다.”
-직접 개발한 향을 예로 들어 설명해달라.
“2014년 개발한 향수 파쉐이(Pashay)는 플로럴 우디 머스크(꽃과 나무향, 동물의 사향이 혼합된 것) 계열 향수다. 이 향수는 아름다운 도자기 피부를 가진 흑인 여성을 떠올리며 만들었다. 그녀의 피부톤이 올리브와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고 올리브의 짠맛에서 소금기가 있는 바다를 떠올렸다.”
-점점 더 많은 소비재 기업들이 시그니처(간판) 향을 개발하고 있다.
“그게 진짜 시그니처가 맞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시그니처가 되려면 다른 곳에는 없는 향이어야 한다. 많은 회사들이 고급 향수 트렌드를 베낀다. 톰포드가 개발한 향수가 괜찮으면 약간 변형해 비슷한 향을 만든다. 그렇게 카피한 향은 내 기준에선 너무 무겁고 강하다.
한국의 한 매장에 방문했을 때 직원이 가장 인기가 있는 향수 3개를 보여준 적이 있다. 3개 모두 다른 브랜드의 카피 제품이었다. 어떤 향수에선 르라보(Le Labo)의 상탈33(santal33)과 거의 비슷한 향이 났다. 다른 곳엔 없는 나만의 독창적인 향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다른 제품을 카피한 향이 넘쳐나는 이유는 뭘까.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향사가 되기 위한 훈련은 오래 걸린다. 수준 높은 조향사는 마스터 퍼퓨머(master perfumer·수석 조향사)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선배로부터 업무 수행에 필요한 영업기밀을 물려 받는다. 영업기밀엔 향을 맡고 분류하는 법, 품질 컨트롤 방법이 포함된다.”
-향을 AR, VR로 내보내는 프로젝트에 참여중이라고 들었다.
“우리가 개발 중인 메타버스에선 나와 똑같이 생긴 아바타가 내가 만든 향수를 직접 소개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향수를 선택하면 이어폰과 비슷한 기기를 통해 향이 흘러 나오는 기능도 준비 중이다. 이 사업과 관련한 특허 11개를 이미 가지고 있다.
완성 된다면 신기술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엄청난 마케팅 방식이 될 것이다. 백화점에 갈 필요 없이 집에 앉아서 원하는 향수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브랜드 오너로서도 나와 얘기해본 적이 없는 매장 직원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고객과 소통할 수 있다.”
-지난해 메르세데스-벤츠의 공식딜러 한성자동차의 자체 향수 제작에 참여하는 등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의 시그니처 향을 만들 수 있나.
“한국을 떠올리면 산에 둘러싸인 도시나 음식, 패션, 문화 등 굉장히 멋진 것들이 많다. 하지만 향은 굉장히 주관적이다. 나의 경험치나 살아온 시대 환경에 따라 느껴지는 향이 다르다. 어떤 한가지 향을 한국이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한국 문화나 한국 여성의 감성의 아름다움에 기반한 향을 만들고 싶다. ”
-향기 마케팅 시장이 앞으로도 더욱 커질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냄새를 맡은 뒤 기억 속에 저장한다. 후각을 관장하는 대뇌 변연계와 피질이 감정적인 기억을 저장하는 뇌 부위와 같기 때문이다. 향기 마케팅은 향을 통해 어떤 상황을 기억하도록 돕는 것이다. 공간이나 브랜드의 시그니처 향을 기억하게 한 뒤 구매로 이어지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다른 마케팅 방식과 차별화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