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C 3조원, 닥터자르트 1조3000억원, 스타일난다 6000억원... 높은 몸값을 받고 글로벌 뷰티 기업에 인수돼 ‘K뷰티 성공 신화’로 불린 기업들의 실적 부진이 계속되고 있다.

한때 중국·일본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며 글로벌 기업들의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낙점됐으나, 최근 들어 세계 시장에서 한국 화장품의 경쟁력이 약화하면서 브랜드 가치가 떨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이은현

27일 화장품 업계에 따르면 2019년 미국 에스티로더컴퍼니즈(이하 에스티로더)에 매각된 닥터자르트는 최근 825억원의 투자금을 유상감자(주식소각) 방식으로 회수했다.

닥터자르트 운영사 해브앤비는 지난 7일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연결감사보고서에서 2022 회계연도(2021년 7월~2022년 6월 30일)에 지분 100%를 보유한 에스티로더 코스메틱 리미티드를 대상으로 825억원 규모의 유상감자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유상감자란 회사가 주식을 유상으로 소각해 자본금을 줄이는 것으로, 기업 규모를 줄일 필요가 있거나 주주들이 투자금 회수를 요구할 때 단행된다. 이 회사는 2020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투자금 2208억원을 회수한 바 있다.

회사 측은 유상감자의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감사보고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재무 영향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없지만, 경영진은 회사가 사업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지역 및 영업 부분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라며 경영의 어려움을 언급했다.

실제 해브앤비의 연결 매출은 에스티로더의 첫 투자가 있던 2015년 863억원에서 2019년 6326억원까지 급증했으나, 2022년 회계연도 매출은 4762억원으로 급감했다. 2019년 1214억원에 달했던 영업이익도 2022 회계연도에 890억원으로 27%가량 줄었다.

해브앤비는 지난해 7월 유한회사로 변경하면서 사업연도 종료일이 기존 12월 말에서 6월 말로 변경돼 이전 실적과 정확한 비교가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실적 감소세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래픽=이은현

2018년 프랑스 로레알그룹에 매각된 스타일난다는 중국 사업 규모를 줄이는 모양새다. 스타일난다는 이달 중 중국 공식 온라인몰의 운영을 중단한다.

앞서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온라인 쇼핑몰인 티몰 해외 플래그십스토어(대표 매장)에서 철수한 데 이어, 지난 6월엔 중국 1호 오프라인 매장인 베이징 점의 문을 닫았다.

2006년 출범한 스타일난다는 동대문 의류를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로 출발해 색조화장품 쓰리컨셉아이즈(3CE)가 중국·일본 등에서 인기를 끌며 연매출 2000억원대 회사로 성장했다. 2018년 로레알에 6000억원에 매각되며 성공 스타트업 사례로 기록됐다.

2019년 매출이 2695억원까지 성장했으나, 이듬해 매출이 5% 감소한 2563억원, 영업이익은 28% 줄어든 443억원을 기록했다. 작년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2273억원, 326억원으로 11.3%, 26.4%씩 줄었다. 로레알도 2020년 유상감자를 통해 1326억원을 회수했다.

2017년 영국 유니레버에 매각된 카버코리아도 2018년 매출 고점을 찍은 후 줄곧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홈쇼핑 화장품 AHC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세 자릿수씩 고성장하는 것을 눈여겨본 유니레버가 3조원을 베팅해 인수했으나, 실적은 인수 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작년 매출(4505억원)은 2018년과 비교해 32% 줄었고, 영업이익(816억원)은 반토막이 났다. 이에 지난 9월에는 희망퇴직을 시행하기도 했다.

잘나가던 K뷰티 브랜드의 실적이 일제히 감소한 이유는 ▲브랜드 파워 약화 ▲시들해진 중국 내 K뷰티 인기 ▲인수 기업들의 경영 능력 부족 등을 꼽을 수 있다.

쓰리컨셉아이즈의 경우 ‘센 언니’ 콘셉트를 앞세워 강한 색조화장품 전문 브랜드로 성장했으나, 코로나19 장기화로 색조 화장을 하지 않는 이들이 늘면서 입지가 줄었다. 기초화장품에 비해 색조화장품의 마진이 낮다는 점도 브랜드의 성장을 저해했다.

업계에서 BB크림을 처음 출시한 닥터자르트와 아이크림을 앞세운 AHC 역시 성장을 이어갈 히트 아이템을 내놓지 못했다.

해외에서 K뷰티 브랜드의 인기가 시들해진 점도 한 몫 했다. 이들은 모두 중저가 브랜드로 모방이 손쉬운 점이 약점으로 지적됐는데, 비슷한 콘셉트를 내세운 중국 로컬 브랜드들이 부상하면서 선두 자리를 뺏겼다.

일각에선 인수 기업들의 경영 능력 부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소희 전 대표가 20대에 동대문 의류를 판매하며 성장한 스타일난다, 건축학도로 피부과 의사와 함께 BB크림을 만들어 닥터자르트를 키운 이진욱 전 대표 등 창업자 정신으로 일군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에 넘어간 후 정체성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화장품 업계 한 관계자는 “닥터자르트, 쓰리컨셉아이즈 등은 화장품 시장에서 개성이 강한 브랜드로 평가됐으나, 글로벌 기업으로 주인이 바뀐 후 평범한 브랜드가 됐다”라며 “최근 신상품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돈벌이’를 앞세운 대기업의 자본 논리 때문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