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 7시,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서울숲 가족마당. 평소 같으면 돗자리 족으로 가득 찼을 잔디 위에 긴 무대와 화려한 조명이 세워졌다.

무대 위엔 밴드 글렌체크의 연주에 맞춰 두툼한 외투와 스웨터를 입은 모델들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이어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껏 멋을 낸 젊은이부터 아빠 어깨에 올라탄 어린이, 산책 나온 노부부까지 함께 흥을 즐기는 것으로 이날의 축제는 마무리됐다.

지난 1일부터 4일까지 무신사가 서울시와 공동 개최한 ‘넥스트 패션 2022′ 행사의 한 장면이다. 국내 패션 브랜드 및 디자이너를 알리고 지원하기 위해 개최한 행사로 노이어, 마르디 메크르디, 백야드빌더, 수아레, 예일 등 55여 개 K-패션 브랜드가 참여했다.

지난 2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열린 '넥스트 패션 2022' 주요 행사인 '넥스트 패션 로드', 밴드 글렌체크의 연주에 맞춰 브랜드 패션쇼가 펼쳐졌다. /김은영 기자

잔디 위에 각 브랜드의 부스를 둘러 세우고 ‘디자이너 토크’, 패션쇼와 콘서트를 결합한 ‘패션 로드’, 안 입는 옷을 새 옷으로 바꿔주는 ‘리웨어’ 등의 행사를 진행했다.

참여 업체 중 70%는 출범 3년 안팎의 신생 브랜드로 구성됐다. 마지막 날인 4일엔 태풍 힌남노의 부상으로 행사가 조기 종료됐지만, 사전 신청자만 1만2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국내 패션 온라인 쇼핑몰 1위 무신사가 이렇게 큰 오프라인 축제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행사를 기획한 김현수 무신사 미디어 본부장(이사)은 “1년여간 준비한 결과물”이라며 “브랜드들을 보양(保養)하기 위해 이런 행사를 기획했다”라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CJ ENM(035760) 오쇼핑, 티몬 사업기획실장 및 패션사업혁신본부장을 거쳐 29CM 부사장을 역임한 이커머스 콘텐츠 전문가로 통한다. 티몬 시절 국내에 처음으로 라이브커머스(라방)를 도입했다. 2020년 무신사에 합류한 후엔 뉴미디어본부와 여성 패션 플랫폼 레이지나잇 사업부를 이끌고 있다.

이날 행사 현장에서 만난 김 이사는 “유통업계가 콘텐츠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르고 빨라야 하며, 자기(브랜드)만의 뉘앙스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 2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 '넥스트 패션 2022' 행사장에서 만난 김현수 무신사 미디어 본부장.

무신사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출발해 상거래 업체로 성공했다. 오프라인 집객 행사를 연 배경은.

“오프라인 축제 형태를 택한 이유는 신진 브랜드들은 많은 자원을 들여 큰 장(場)을 열거나, 패션위크 같은 행사에 초대돼 주목받기가 어려워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신사 입점 브랜드들은 일상복이 많고, 상품 종류가 적어서 막상 패션쇼 기회가 와도 멋지게 연출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콘서트와 패션쇼를 결합한 무대를 선보였다.

무대 위에 오른 모델은 신인 모델로만 선발했고, 공연하는 뮤지션들도 홍대 인디 씬(Indi Scene)에서 성장하고 있거나 성장한 이들로 구성했다. 오늘 공연한 첫 게스트인 머드 더 스튜던트는 ‘쇼미더머니 10′ 출신 래퍼이고, 헤드라이너는 인디에서 출발해 이름을 알린 글렌체크다.”

'넥스트 패션 2022' 행사장 입구. /김은영 기자

유통업계에서 ‘콘텐츠’는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전략이 된 거 같다. 갈수록 콘텐츠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통에는 ‘라이프 매니징’과 ‘라이프 스타일링’ 두 영역이 있다고 본다. 라이프 매니징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소비다. 생수가 떨어지면 생수를 사고, 계란이 떨어지면 계란을 사는 ‘결핍이 이끄는 소비’다. 이 시장은 가격이나 물류 등 인프라가 중요하다.

반면, 라이프 스타일링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소비를 뜻한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지만, 누군가 들고 입으면 나도 갖고 싶은 ‘욕망이 이끄는 소비’다. 주로 패션, 뷰티, 리빙 영역에서 발생한다.

그 욕망은 소셜 미디어(SNS)와 같은 외부 자극에서 시작된다. 평소에 관심도 없던 가방인데, SNS에서 고등학교 동창이 든 사진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특히 소비자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이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욕망을 자극받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유통업체에게 콘텐츠는 욕망을 창조하는 활동이라 볼 수 있다. 콘텐츠를 통해 ‘나도 저걸 경험해 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건드려야 한다.”

모두가 ‘콘텐츠’에 뛰어드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피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콘텐츠로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

“팀원들에게 항상 ‘다르고 빨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달라지기 전에 빠르기만 하면 의미가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 않나? 어떤 새로운 콘텐츠 포맷이 나왔을 때 포맷으로 차별화하는 건 한계가 있다.

예컨대 라방이라는 포맷은 이미지와 영상, 텍스트(글) 세 가지로 구성됐다. 빨리 적용할 수는 있지만, 포맷만으로 차별화하긴 어렵다. 자신만의 ‘브랜드 뉘앙스(Nuance)’로 차별화를 만들어야 한다.”

뉘앙스란 무엇인가?

“디테일이 다른 것? 라방을 예로 들어보면 무신사는 숙련된 쇼 호스트가 아닌 사내 스타일리스트와 에디터들이 방송을 진행한다. 방송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그 브랜드의 성장을 수년간 함께한 사람들이 판매한다. 그것이 무신사만의 뉘앙스다. 풀어서 얘기하면 ‘살아있는 정체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처음 무신사가 라방을 했을 때 1~100회까지 회당 평균 거래액이 1억2000만원이었다. 어떤 브랜드는 회당 매출이 4억원이 넘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 하나를 만드는 데 자원이 많이 투입되다 보니, 기획자 입장에선 매출이 잘 나오는 브랜드만 팔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반대를 했다. 신생 브랜드의 라방도 하는 게 ‘무신사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일주일에 1회 했던 라방을 지금은 4회 진행하고 있다. 당연히 평균 매출은 예전보다 낮아졌다. 그러나 많은 브랜드들에게 라방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 즉 뉘앙스라고 생각한다.”

2일 '넥스트 패션 2022'에서 진행된 '토크 어라이브' 행사에서 아티스트 마이큐가 발언하고 있다. /김은영 기자

무신사의 뉘앙스를 정의해 달라.

“입사한 지 3년 정도 됐는데, 무신사만의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정확히 정의는 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주류 감성을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신사의 거래액이 커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비주류적이고 유니크한(개성 있는) 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성수동에 실험적인 디자이너 브랜드 상품만 모은 편집숍 ‘엠프티’를 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신사의 모든 것엔 비주류 감성이 한 방울 있다.”

라방을 국내에서 처음 선보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를 전후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라방의 미래는 어떻게 보나?

“흔히 라방하면 중국 시장을 예로 드는데, 중국의 라방은 우리와 다른 형태로 성장했다. 라이브 커머스라기보다 유명인이 상품을 파는 인플루언서(인터넷 유명인) 시장에 가깝다. 특정인의 유명세에 따라 판매가 좌우되는 형태다.

국내에서 라방은 커머스의 한 기능(Tool)으로 장착될 거라고 본다. 쇼핑 플랫폼에서 회원가입을 하거나 할인 쿠폰을 받듯, 좀 더 비용이 드는 필수 쇼핑 툴로 정착될 것으로 생각한다.”

무신사가 지난해 진행한 의류 브랜드 리(lee) 라이브 방송 모습. / 무신사

향후 콘텐츠 커머스 시장을 전망한다면.

“콘텐츠 커머스란 콘텐츠를 활용해 고객에게 브랜드와 상품을 제안해 유통하는 것을 뜻한다. 다만, 제조사와 유통사의 콘텐츠 활용은 차이가 있다. 제조사의 콘텐츠 마케팅은 브랜딩을 의미하지만, 유통사는 자신(플랫폼)을 브랜딩하지 않는다. 플랫폼이 유통하는 대상, 즉 입점사를 위한 콘텐츠를 만든다. 사실상 B2B2C(기업-기업-개인)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특정 브랜드의 콘텐츠를 잘 만들수록 해당 브랜드는 다른 커머스 업체가 아닌, 우리 플랫폼에 더 좋은 조건으로 상품을 줄 것이다. 플랫폼에게 콘텐츠 활동은 단순한 마케팅 활동이 아닌 영업 활동인 셈이다.

소비자가 콘텐츠를 만드는 환경이 다양해질수록, 콘텐츠 커머스는 더 입체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입체적’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모든 포맷을 가능한 동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오프라인의 재료로 온라인에서 콘텐츠로 만들어 공유하는 방식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핫 플레이스(명소)라고 불리는 곳들을 보면 경리단길이나 성수동처럼 어떤 맥락 안에 자리한다. 온라인에서도 성수동 같은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플랫폼이 콘텐츠 커머스도 이끌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