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 좋은 패션·식품 기업들이 속속 부동산 디벨로퍼(개발자)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유통업계의 '힙한'(최신 유행에 밝은) 콘텐츠가 있는 건물의 가치가 오르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덕입니다.
2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패션 회사 LF(093050)의 식품 자회사 LF푸드는 오는 3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브런치 레스토랑 '메종 드 그루메'를 개장합니다. 메종 드 그루메는 LF푸드와 합병한 구르메F&B가 수입하는 고급 식자재를 소비자들에게 선보이는 공간입니다. 이즈니 버터가 들어간 잠봉 뵈르부터 최고급 캐비어를 활용한 음식까지 즐길 수 있습니다.
LF는 이 공간을 위해 지난해 약 400억원을 들여 서울 강남구 신사동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통상 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임차해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사업이 순항기에 접어들면 건물을 매입하는데, 언뜻 보면 순서가 바뀐 셈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LF의 메종 드 그루메 정도면 핵심 임차인으로 분류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핵심 임차인 덕에 건물 가치가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LF는 메종 드 구르메의 집객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건물 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 처음부터 '남의 건물'에 좋은 일을 시켜 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앞서 메종 드 그루메가 과거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식자재 판매 점포를 운영했고, 여기에서 어느 정도 사업성이 증명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LF푸드 관계자는 "새로운 메종 드 그루메를 개장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레스토랑을 포함한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LF만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유통사 중 부동산 디벨로퍼로서 가장 명성이 높은 곳은 무신사입니다. 무신사는 2019년부터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 부동산을 집중 매입해 무신사 타운을 조성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수동2가 271-22번지의 옛 동부자동차서비스 부지입니다. 무신사는 이 부지를 220억원에 매입해 무신사 캠퍼스 E1으로 개발했습니다. 연면적 1만533㎡ 규모의 오피스 건물인데 이는 마스턴자산운용에 1150억원대에 매각됐습니다. 무신사가 15년 임차를 약속한 세일앤리스백(매각 후 재임대) 방식이었습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매각 이후에도 무신사가 투자자로서 지분에 참여해 건물 가치 상승에 따른 차액을 살뜰히 챙겼다"고 했습니다.
앞서 건물 가치 극대화의 대명사는 명품 회사들이었습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인 프라다와 미우미우가 대표적입니다. 프라다 서울 강남구 청담점 빌딩은 지난해 연면적 3.3㎡당 1억3000만원, 대지면적 3.3㎡당 4억3200만원에 거래됐습니다. 전체 매도 가액은 550억원 수준입니다. 미우미우 빌딩은 2024년 10월에 연면적 3.3㎡당 9600만원, 대지면적 3.3㎡당 4억3700만원에 거래됐습니다. 명품 임차인이 들어서고 건물 가격이 대폭 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최근에는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드라마 대사도 나왔습니다. 이달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서는 극 중 청담동 명품 거리의 한 건물주는 자산 상위 0.1%가 사용하는 명품 가방 브랜드의 한국 지사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팝업(임시 매장) 공간이 고민이라고? 싸게 임차해 줄 테니 우리 건물로 들어와. 자기가 들어와서 건물값 좀 올려줘. 위치가 아주 좋아. 봐봐."
부동산업계에서는 예전처럼 건물의 소유권을 가진 건물주의 시대는 지난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한때 '주님 위에 건물주님'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 이제는 건물을 채우는 콘텐츠가 더 중요해진 시대라는 것입니다.
공간을 변신시켜 가치를 올리는 사람들에 관한 책 '핫플레이스를 만드는 플레이어'의 저자 신지혜 STS개발 상무는 "이제 건물주 위에 핫플레이스 메이커가 있다"며 "건물 매각에 따른 자본이득이 적어졌고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만으로는 대출이자를 맞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건물의 콘텐츠를 어떻게 만드는지가 더 중요해졌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먹고 입고 마시는 소비재를 팔아 수익을 내는 기업들이다 보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도 감각적으로 잘 아는 모양입니다. 앞으로 부동산 시장에서 패션사, 식품사, 유통사들이 어느 정도로 역량을 뽐낼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