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이 100만원짜리 가방을 사면, 1년 뒤 중고 시장에서 80만원에 팔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의 딸 피비 게이츠가 2025년 4월 출시한 '피아(Phia)'는 전 세계 4만여 개의 이커머스 데이터를 스캔해 상품을 검색해 주는 패션 검색엔진이다.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신상품과 중고 물품 가격을 나란히 비교해 주고, 향후 재판매 가치까지 예측해 준다. 피아는 앱 출시 8개월 만에 75만 번 내려받기를 기록했고, 같은 해 12월 1억8000만달러(약 2654억원)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다. 업계는 이를 정가 위주의 신상품 시장이 시장의 '실질 가치'로 재편되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 영국 셀프리지백화점은 중고 거래 서비스 '리셀프리지(Resellfridges)'를 운용 중이다.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와 희귀 아이템, 고객이 내놓은 중고 물품 등을 판매한다. 2023년 기준 리셀리지를 포함한 순환 서비스 매출은 14%를 차지했다. 백화점 측은 2030년까지 매출 45%를 순환 경제 모델로 창출하겠다고 밝혔다.
한 번 유통된 상품을 다시 사고파는 리커머스(중고 거래)가 유통 업계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쓸모없는 물건을 싸게 처분하는 시장'에 머물던 중고 거래는 첨단 기술이 탑재되고 시장 참여자가 늘면서 '리커머스 3.0' 시대에 접어들었다.
시장조사 업체 팩트엠알(Fact.MR)에 따르면, 2025년 글로벌 리커머스 시장 규모는 2025년 5250억달러(약 771조원)로 추산되며, 연평균 14.8%씩 성장해 2035년에는 2조8700억달러(약 4216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국내 리커머스 시장이 2008년 4조원에서 2025년 43조원으로 커졌다고 추정했다. 2025년 국내 소매시장(521조원) 대비 8.3% 수준이지만, 성장률은 43%로 소매시장(1.2%)를 압도했다.
'이코노미조선'은 유통시장을 흔드는 리커머스의 현주소와 전망을 국내외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분석했다. 전문가는 리커머스가 '대안 소비'가 아닌 '표준 소비'로, 유통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관세에 환경 규제까지… 주류가 된 중고 거래
리커머스의 첫 동력은 거시 경제다. 고물가·고금리로 실질소득 압박이 강해지면서 가격에 민감해진 소비자가 중고를 찾고 있다. 특히 미국은 관세정책 여파로 소비재 가격이 흔들리며 중고 물품 수요가 급증했다. 1995년 온라인 첫 경매 사이트로 출범한 이베이(eBay)는 리퍼브(반품·전시품 등을 점검해 되파는 상품) 가전과 수집품 거래가 증가하며 2025년 3분기 총거래액(GMV)이 전년 대비 10% 증가했다. 주가는 연초 대비 70%까지 치솟았다.
둘째는 환경 규제 강화다.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가 강화되면서, 중고 거래를 통한 자원 순환이 활성화하고 있다. 프랑스에선 중고 의류 플랫폼 빈티드(Vinted)가 2025년 판매량 기준 아마존·쉬인을 앞질렀다는 분석도 나왔다. 프랑스패션연구소(IFM)에 따르면, 프랑스 의류 판매량의 약 10.9%가 중고 물품이고, 18~34세에서는 그 비중이 16.3%까지 높아졌다.
셋째는 플랫폼의 고도화다. 안전 결제 시스템(에스크로), 위험 거래 탐지, 상품 검수 같은 기술 기반 신뢰 인프라가 구축되며 리커머스를 표준 소비로 끌어올렸다. 일본 최대 중고 거래 플랫폼 메루카리(メルカリ·Mercari) 창업자 야마다 신타로 대표는 "판매 과정이 번거롭거나 위조품에 대한 불안이 크면 시장은 성장하지 않는다"며 "기술을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물찾기하는 Z 세대… '리커머스 리터러시' 향상 주도
중고 거래 시장을 이끄는 건 Z 세대(1997년~2010년생)다. Z 세대에게 중고 거래는 남이 쓰던 낡은 물건이 아니라, '보물찾기'처럼 내 취향을 발굴하는 과정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Z 세대 옷장에서 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32%를 넘어섰다. 중고 의류 플랫폼 스레드업(ThredUP)의 조사에선 젊은 세대의 64%가 구매 전 재판매 가치를 고려한다고 답했다.
메루카리와 번개장터 등 주요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캐릭터 굿즈(기념품), K-팝 아이돌 포토 카드 등 엔터테인먼트·취미 카테고리의 거래 비중은 40%가 넘는다. 최재화 번개장터 대표는 "소비자의 '리커머스 리터러시(recommerce literacy·중고 거래 이해도)' 가 향상되고 있다"며 "중고 거래는 내 취향을 찾고 자원을 순환시키는 리커머스이자, 백화점과 경쟁하는 유통의 한 카테고리가 됐다"고 말했다.
리커머스 3.0 명품·백화점도 뛰어들었다
리커머스 시장은 오프라인 중고 매장이 중심이던 1.0, 디지털 판매 플랫폼이 확산한 2.0을 거쳐, 백화점과 브랜드, 대형 유통 플랫폼이 리커머스를 끌어안는 리커머스 3.0 시대로 접어들었다.
파타고니아, 룰루레몬 등은 자사 중고를 매입·수선해 재판매하고, 롤렉스, 버버리, 발렌시아가 등 명품도 브랜드 주도로 중고 거래를 지원한다. 유통 업체도 뛰어들었다. 현대·롯데백화점은 중고 의류 수거와 포인트 리워드(보상)를 결합한 서비스로 고객 록인(lock-in·잠금 효과)을 노린다. 국내 최대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중고 의류 거래를 중개하는 '무신사 유즈드'를 2025년 8월 출범했다. 올해 1월 기준 일 평균 등록되는 중고 의류는 2800여 벌, 판매 중인 상품 수는 13만 종에 달한다. 오는 3월에는 롯데몰 은평점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 예정이다.
BCG는 글로벌 중고 럭셔리·패션 시장이 연평균 10%씩 성장해 2030년에는 3600억달러(약 480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신상품 시장보다 세 배 빠른 속도로, 프리러브드(pre-loved)의 부상을 입증한다. 일각에선 '자기 브랜드 잠식'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펠릭스 크뤼거 BCG 독일 퀠른 오피스 매니징디렉터(MD) 파트너는 "과장된 우려" 라며 "소비자 3분의 2는 중고로 브랜드를 처음 접한다. 리커머스는 브랜드 수명을 연장하고, 이탈 고객을 재연결하는 통로"라고 했다.
다음 전장은 크로스보더… '축적 소비' 유발 비판도
리커머스의 다음 승부처는 국경을 넘는 '크로스보더(국경 간)' 거래가 될 전망이다. 최근 K-컬처 열풍과 맞물려 한국의 중고 한정판 굿즈 등을 찾는 해외 수요(역직구)가 늘고 있다. 국내에선 '철 지난 물건'이 해외에선 '희귀한 물건'으로 대접 받는 생태계가 만들어진 셈이다. 그런 만큼 업계에선 관련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각에선 리커머스가 내세우는 '환경보호' 와 '지속 가능성'이 소비를 더 부추긴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메이탈 펠렉 미즈라히 드레스웰 설립자는 "중고 거래가 '언제든 되팔 수 있다'는 심리적 면책감을 줘 오히려 전체 소비량을 늘리는 축적 소비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마그달레나 플론카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패션학교 설립자는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위해선 생산 단계부터 내구성을 고려해야 하며, 제품의 전 생애 주기를 추적하는 디지털 의류 여권 같은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