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9일 올해 첫 상반기 VCM(Value Creation Meeting·舊 사장단 회의)을 마쳤다. 지난해 말 유동성 위기설로 홍역을 치른 뒤 진행한 첫 그룹 경영 전략 회의다. 그룹 분위기 탓인지 이날 VCM에 참석한 각 계열사 대표 80여 명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이들에게 그룹이 직면한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통한 돌파구를 마련하고, 대혁신의 전환점이 될 고강도 쇄신을 주문했다.
VCM은 이날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신 회장 주재 하에 오후 2시부터 4시간가량 진행됐다. 롯데지주(004990) 대표이사와 실장, 사업군 총괄대표, 계열사 대표 등 약 80명이 참석했다. 특히 신 회장은 VCM에 앞서 ‘인공지능(AI) 과제 쇼케이스’에 참석하기로 한 만큼, 회의 참석자들에게 일찍 회의장에 올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쇼케이스에 참석한 롯데이노베이트(286940), 대홍기획 등 9개 계열사는 그룹 내 AI 혁신 사례를 소개하고, AI 우수 활동 사례들을 선보였다.
롯데그룹 계열사 대표들은 VCM 시작 전부터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취재진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는 취재진이 묻는 질문에 모두 굳은 표정을 지을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함께 입장한 남창희 롯데하이마트(071840) 대표와 강성현 롯데마트 대표도 ‘어떤 내용이 논의되는지’ 묻는 말에 “나중에 말하겠다”고 짧게 답한 뒤 회의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타마츠카 겐이치 일본롯데 대표, 박익진 롯데이커머스사업부(롯데온) 대표, 김동하 롯데면세점 대표, 이돈태 롯데지주(004990) 디자인전략센터장 등도 따로 회의 예정 내용이나 경영 방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이날 VCM에서 각 계열사 대표를 향해 “지금이 변화의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하고 이번 위기를 대혁신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른 시간 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유형 자산 매각, 자산 재평가 등 다양한 방안을 시행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사업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로 수익성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 회장은 자사 그룹의 위기가 발생한 근본적 원인으로 핵심 사업의 경쟁력 저하를 꼽았다. 그는 “지금 쇄신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며 “과거 그룹의 성장을 이끈 헤리티지(Heritage·유산)가 있는 사업일지라도 새로운 시각에서 사업 모델을 재정의하고 사업 조정을 시도해 달라”고 말했다.
이날 신 회장이 제시한 올해의 경영 방침은 ▲도전적인 목표 수립 ▲사업 구조 혁신 ▲글로벌 전략 수립 등이다. 특히 본질적인 쇄신을 위해 관성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사업 구조와 업무 방식을 혁신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도전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국내 경제·인구 전망을 고려했을 때, 그룹의 성장을 위해 해외 시장 개척은 가장 중요한 목표다. 해외 시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차별화된 사업 전략을 수립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 달라”고 했다.
이어 “우리 롯데그룹은 역경을 극복하는 DNA(유전자)가 있어 IMF(국제통화기금), 코로나 팬데믹 등 수많은 위기를 모두 돌파해왔다”며 “대표 이사를 포함한 모든 임직원이 함께 노력한다면 어떤 위기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독려했다.
지난해 11월 정기 인사에서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겸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도 VCM에 참석해 특별한 발언 없이 아버지 신동빈 회장의 회의 내용을 경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부터 매년 VCM에 참석했던 신 부사장은 지난 7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VCM에 참석했다. 이날 신 부사장도 별도의 발언 없이 VCM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엄중한 분위기는 VCM이 끝난 후에도 이어졌다. VCM을 마친 뒤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나서면서 취재진 질문을 받던 예년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롯데에 따르면 VCM이 끝난 직후 신 회장과 계열사 대표들은 롯데월드타워에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해당 엘리베이터를 탄 대표 20여 명은 굳은 표정만 지은 채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취재진 질문이 부담스러워 VCM 직후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부 통로를 통해 먼저 퇴장한 대표들도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