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매시장 규모는 약 514조원으로 전년 대비 1% 내외 성장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도 탄핵 정국과 미국 트럼프 정부 2기 출범, 초고령사회 진입, 이상기후, 최저임금 인상 등 복합 위기로 인한 저성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소매시장 성장률 전망치를 0.4%로 예상하기도 했다. 조선비즈는 새해를 맞아 저성장 시대에 맞는 유통은 무엇이고, 우리 유통업계는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할지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유통업계가 자체 브랜드(PB) 상품 전략에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트렌디함과 가격 경쟁력만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끝난 것이다. 그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만 소비자의 꾸준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PB 상품의 생애주기가 짧아지는 추세다. 상품 생애주기는 처음 출시된 상품이 판매 과정에서 인기가 차차 떨어지면서 잘 팔리지 않게 되는 순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단명한 ‘두바이 초콜릿’이 대표적이다. 틱톡·릴스 등 숏폼(짧은 영상) 콘텐츠에서 인플루언서·유튜버 등의 먹방으로 유명해진 두바이 초콜릿을 편의점들이 PB 상품으로 선보였다.
현지에서 파는 오리지널 두바이 초콜릿 가격이 2만4000원이었던 것에 비해 편의점 PB 판매가는 4000~1만원에 형성됐다. 초반엔 조기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그 인기는 한 달도 안 돼 식었다. 업계 관계자는 “편의점에서 두바이 초콜릿을 선보일 때쯤 이미 트렌드는 스웨디시 젤리 등 바뀐 상태였다”며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에 두바이 초콜릿을 찾던 수요도 사라진 것”이라고 했다.
유통업계는 PB 상품 전략을 제고하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반영한 채 초저가 경쟁만으로는 고물가·저성장 시대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꾸준히 받는 데 한계가 있는 탓이다. 특히 PB 상품 시장의 성장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가치까지 갖춘 ‘특화 PB’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국내 일용 소비재 시장은 직전 해 같은 기간 대비 2.2% 감소한 20조7000억원 규모였다. PB 상품 시장은 이 같은 전반적인 하락세에도 1.1% 성장했다. 특히 유통 채널에서 편의점과 슈퍼는 각각 6.6%, 11%의 성장세를 보였다.
업계 관계자는 “PB 시장이 점차 커지자, 소비자들이 PB 상품에서 고품질과 높은 가치를 찾는 경향이 커졌다”며 “같은 선상에서 비슷한 수준의 제품들끼리 아무리 초저가 경쟁을 해봤자 그들에겐 더 이상 매력적인 요인이 아닌 디폴트(Default·기본값)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트렌드·초저가만 추구하지 않는다”… 해외 유통업계, PB 상품에 담을 ‘가치’ 고민
해외 유통업계는 트렌디함과 초저가로 선보인 PB에 ‘가치’를 더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 월마트는 지난해 4월 PB ‘베터굿즈(bettergoods)’를 출시했다. 베터굿즈는 생활용품부터 의류, 식품 분야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브랜드다. 판매가는 2~15달러 사이로 대부분 5달러(한화 약 7350원) 이하의 가격대다. 특히 건강 차원에서 글루텐프리를 포함해 무설탕·무색소·무향료·식물성 기반의 프리미엄 식료품을 추구한다.
이는 고품질·저가격 전략이다. 고소득층 소비자도 충성 고객이 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월마트는 지난해 3분기 매출 1696억달러(한화 249조3459억원)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5% 증가한 수치다. 월마트 측 관계자는 “주로 고소득층 고객 구매가 늘어나면서 실적이 개선됐다”라고 했다.
일본 세븐일레븐은 가치·건강·친환경 소비 등 트렌드를 반영한 PB 상품을 가격대로 한 번 더 세분화하는 전략을 선보이고 있다. 무조건 가격을 낮춰 ‘싸구려’ 이미지를 주는 걸 지양한다. 가격대를 ‘고품질’, ‘일상’, ‘가격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나눠 제품 선택과 소비를 고객에게 일임하는 방식이다. 세븐일레븐 재팬 관계자는 “가장 저렴하다고 무조건 더 인기가 있진 않았다”며 “초저가만으로는 수익성 개선이 어렵다고 봤다. 고객 스스로 가치를 매기는 전략을 추구한 이유”라고 했다. 고객 맞춤형 PB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해 충성 고객을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독일의 알디(Aldi)는 PB 상품에 지속 가능한 가치를 담고 있다. 2022년 기준 독일의 소비재 시장 PB 상품의 매출 비중은 42.8%에 달한다. 그만큼 PB 상품 소비가 많다. 이때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독일 소비자들은 PB 제품을 구매할 때에도 환경 보호를 고려하자, 이를 PB 상품 패키지 전략에 적용했다. 초저가로 선보인 필스너 맥주 번들에 사용된 플라스틱 랩과 고리를 100% 재활용 가능한 종이 소재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시대에 새로운 가치를 담아야 PB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한다. 트렌드를 반영한 초저가 경쟁만으로는 한시적인 소비자 선택이 전부라는 것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올해는 저성장 시대가 예고된 만큼 소비재를 다루는 유통업계 전반적으로 가성비 좋은 PB 시장이 더욱 커질 것”이라며 “트렌드만 반영해 ‘반짝 상품’으로 끝나지 않도록 고품질과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초저가 PB 상품만 만들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맞닿은 가치를 PB 상품에 접목해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다면, 가치 소비를 통한 시너지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