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가 명절 때마다 반복했던 최고가 선물 경쟁이 사라졌다. 내년 설을 앞두고 백화점과 편의점을 포함한 주요 유통채널은 수억 원짜리 고가 선물 대신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알뜰 선물 세트를 앞세웠다.
2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과 편의점을 포함한 주요 유통채널이 23일부터 내년 설 선물 세트 사전 예약을 시작했다. 3개월 전 올해 추석에 백화점과 편의점 3사는 최고가 선물 자리를 두고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지난해 추석에는 롯데백화점이 내놓은 프랑스 최고급 와인 샤토 페트뤼스(Petrus) 18병 세트가 추석 최고가 선물 자리를 차지했다. 3개월 전 올해 추석에는 편의점 CU와 GS25, 세븐일레븐이 동시에 내놓은 5억원짜리 스코틀랜드 위스키 ‘윈저 다이아몬드 쥬빌리’ 위스키가 이 자리를 빼앗았다.
내년 설 선물 세트에서는 고가 와인이나 위스키를 찾아보기 어렵다. 백화점과 편의점이 내년 설을 앞두고 내놓은 선물 안내 책자를 보면 모두 가성비와 실속을 강조했다.
편의점 프랜차이즈 CU는 올해 특별 선물 세트로 1만9990원짜리 고구마말랭이세트, 편육과 족발 등으로 구성한 1만9000원짜리 실속 육가공 세트 등을 제시했다.
지난해 수천만~수억원대 위스키가 즐비했던 주류 코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술로 채웠다. 5억원짜리 위스키 대신 CU는 내년 설 주요 선물로 4만4900원짜리 발렌타인 10년 위스키를 권했다. 책자에서 가장 비싼 위스키값은 169만원 수준이었다.
GS25는 설 선물 세트 사전 예약 안내 책자에서 아예 주류를 제외했다. 대신 10만~30만원대 중반 굴비와 정육 세트를 다양하게 선보였다.
오로지 세븐일레븐이 예년처럼 고가 위스키를 설 카탈로그 전면에 배치했다. 그마저 1300만원대에 그쳤다. 올해 설이나 추석 최고가 선물에 비하면 30분의 1 수준이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역시 고급 선물보다 실속과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설 선물 세트를 선보였다. 이마트는 10만원 미만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가성비 한우 세트를 내년 설 선물 세트 주력 상품으로 내세웠다. 수산 분야에서도 10만원 이하로 구입할 수 있는 신규 세트를 기획했다.
홈플러스는 내년 1월 15일까지 2025 설 선물세트 사전 예약을 받는데, 2만~6만원대 선물세트 상품 수를 24% 늘렸다.
신세계백화점은 직거래 비중을 확대해 선물세트 가격을 낮췄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주력 상품대 가격을 10만~20만원대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축산 바이어가 직접 우육(牛肉) 경매에 참여하거나, 신세계 지정 산지 셀렉트팜에서 수확한 과일을 이용해 유통 과정을 줄였다”며 “명절 선물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속형과 프리미엄 라인을 세분화해 세트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올해 하반기 이후 전 세계 물가가 급등하고, 경기가 식으면서 국내 소비자들 구매 행태가 불황형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필수품에 해당하는 선물 세트를 이전보다 덜 사거나, 사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싼 제품을 찾는 행태가 불황형 소비의 대표적인 예다.
올 연말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상계엄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국내 소비심리는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8.4를 기록했다. 이전 달보다 12.3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하락 폭을 놓고 보면 팬데믹 때였던 2020년 3월(-18.3포인트) 이후 가장 가파르다.
소비자심리지수 자체도 2022년 11월(86.6) 이후 2년 1개월 만에 가장 낮다. 이 지수는 100보다 크면 소비자 기대 심리가 장기 평균(2003∼2023년)과 비교해 낙관적이라는 의미다. 100보다 작으면 기대 심리가 비관적이라는 뜻이다.
김소형 데이비스앤컴퍼니 컨설턴트는 “올해 2분기 전체 가계소득이 역신장하며 가계 흑자액이 큰 폭으로 감소한 여파가 추석을 지나 연말부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필수 소비재에 해당하는 식품이나 뷰티 분야에서는 불황형 소비 트렌드가 상대적으로 덜 나타나고 있지만, 선물세트에서는 개인 소비 여력이 감소하면서 효율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당분간 뚜렷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