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를 계기로 상품권 시장의 민낯이 드러났다. 티메프는 유동성 확보를 위해 손해를 보면서도 상품권 할인율을 높였고, 간편결제사들도 충전 한도를 높여 ‘상테크(상품권+재테크)’를 부추겼다. 정부가 1999년 상품권법 폐지 후 관련 시장을 방치하자 지하 경제 규모가 커졌고, 순수한 재테크 목적이 아닌 조직적인 개입도 있었다.
티메프에서 할인 판매된 문화상품권(해피머니 문화상품권·컬처랜드 문화상품권·도서문화상품권) 규모는 연간 3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0% 할인으로 유혹... 유동성 확보 위해 손해 보며 상테크 판 깔아준 티메프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상테크란 신용카드로 온라인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문화상품권 등을 구매하고, 간편결제 포인트를 액면가로 전환해 차익을 남기는 걸 의미한다. 통상 현금성 쿠폰이나 상품권의 할인율은 3~5% 수준이지만, 티메프는 8~10% 싸게 팔아 상테크족을 끌어모았다.
티메프는 상품권 회사들로부터 6.5% 판매수수료를 수취하고 자기부담금 1.5%를 더해 액면가 5만원 문화상품권 등을 8% 할인해 4만6000원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신용카드 수수료(1.5%)가 발생해 티메프는 총 3%를 손해 봤다.
상품권 회사는 티메프에 판매수수료(6.5%)를 지급하고, 간편결제 회사에서 6.8~7%의 가맹수수료를 수취해 0.3~0.5% 수익을 냈다. 간편결제 회사는 상품권 회사에 가맹수수료(6.8~7%)를 지급한 후 포인트 전환 고객에게 8%의 수수료를 징수해 1~1.2% 수익을 냈다.
소비자는 티메프에서 8% 할인된 상품권을 산 후 간편결제 회사에 수수료 8%를 지불하고 이를 포인트로 바꿨다. 이때 소비자가 본 이익은 없지만, 신용카드 이용 실적 및 항공 마일리지 적립 등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상품권을 대량 구매할수록 혜택은 더 커졌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이득을 본 곳은 간편결제 회사다. 티메프는 손해를 봤지만, 유동성을 확보했다. 상품권을 판 후 받은 대금을 40~70일 후 상품권 회사에 지급하면서 그 돈을 경영 자금으로 운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상품권 업계에 따르면 티메프는 월평균 2300억원어치의 상품권을 판매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상테크 자금 흐름의 맨 앞에 있던 티메프가 셀러(판매자) 정산금 미지급 사태 후 법원에 회생 신청을 하면서 상품권 회사, 구매자, 간편결제 회사가 모두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업계에 따르면 상품권 회사들은 매달 10일 간편결제 회사에 정산금을 지급하는데, 티메프가 회생 신청에 들어가면서 판매대금을 받지 못해 정산금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달 상품권 회사들이 간편결제 회사에 지불하지 못하는 대금은 최소 2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한 상품권 회사 관계자는 “엄청난 금액의 판매 대금을 받지 못한 상품권 발행사들은 10일 이후에 벌어질 일에 눈앞이 막막한 상황”이라며 “티메프 사태로 상품권 가맹점들이 문을 걸어 잠그면서 상품권을 본래 목적으로 사용하는 소비자들도 출구가 막혔다”고 말했다.
◇충전 한도 높인 간편결제사들도 한몫... 상품권 시장 조폭 개입설도
상품권 환급처인 간편결제 회사들도 충전 한도를 높여 상테크를 부추겼다. NHN페이코는 월 200만원이던 해피머니·컬쳐랜드 충전 한도를 올해 2월 300만원, 3월 400만원으로 높였다. 월 100만원이던 북앤라이프 상품권의 월 한도도 7월부터 200만원으로 올랐다. KG모빌리언스(046440)는 월 400만원이던 북앤라이프의 충전 한도를 지난 4월 6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고, 지난달엔 월 1000만원까지 높였다. 당초 100만원이던 해피머니·컬쳐랜드·문화상품권 등 상품권 3종의 일간 한도도 지난 4월 600만원으로 올렸다.
충전 한도가 높아지자, 조직적으로 상테크를 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전직 상품권 회사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티메프 사태 발생 후 한 상품권 회사 대표는 26억원어치 상품권을 소지한 조직 폭력배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티메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상품권을 할인 판매하지 않았다면, 또 간편결제 회사들이 즉시 현금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혜택을 늘리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상테크 시장은 존재할 수 없었다”면서 “티메프와 간편결제 회사 사이에 현금 운용 규모에 대한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티메프 사태로 드러난 ‘상품권 돌려막기’... 정부, 뒤늦게 제도개선 추진
사태가 커진 건 정부의 방치 탓도 크다. 상품권은 현금을 대체하는 유가증권이다. 상품권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 현금영수증을 발행해 주는 것도 현금 대체 수단이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돈)로 보긴 어렵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상품권은 가맹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범용적인 결제 수단이 아니라는 얘기”라며 “통화로 보고 관리할 대상은 아니다”라고 했다. 일종의 지하 경제로 본다는 의미다.
일례로 상품권의 신용카드 결제 여부는 상품권 발행사가 정한다. 롯데·현대·신세계 등 백화점의 경우 오프라인 영업점에서 상품권을 현금이나 법인카드로만 판매한다. 개인은 월 100만원 한도 내에서 체크카드로만 구매할 수 있다. 백화점들은 신용카드로 구매한 백화점 상품권을 상품권 취급 업체에 되팔아 현금화하는, 이른바 ‘상품권깡’에 악용될 것을 우려해 자율적으로 이런 제도를 시행한다. 그러나 백화점 온라인몰이나 카카오톡 선물하기, 네이버쇼핑 등에서는 신용카드로 모바일 백화점 상품권을 구입할 수 있다. 관련 규정이 없는 탓이다.
앞서 정부는 1961년 상품권법을 제정하고 상품권 시장을 관리했다. 그러나 1999년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제약한다’는 이유로 해당 법을 폐지했다. 상품권이 관리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수많은 유통업체가 상품권을 발행했고, 이커머스(전자상거래)에서는 선불전자지급수단 형태로 진화했다. 선불전자지급수단은 일정 금액을 충전해 제3자가 판매하는 재화 구매 시 사용할 수 있는 페이나 포인트를 말한다. 선불전자지급수단이 무분별하게 발행돼 피해를 키웠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선 다음 달 15일부터 시행되는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 개정안을 통해 선불전자지급수단 발행업체의 등록 면제 기준을 강화해 모바일 상품권을 규율 대상에 포함할 방침이다. 기존에는 발행잔액 30억원 미만인 업체에 대해서만 등록을 면제했으나, ‘연간 총발행액 500억원 미만’이라는 기준을 추가한다. 여기에 선불충전금에 대해 100% 예치·신탁을 의무화한다. 선불업자가 파산해도 선불충전금의 환급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일부 기업만 규제 대상이 돼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전금법을 추가 개정해 관리 대상이 되는 업체의 발행액 기준을 낮추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