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사업)이 가진 특성상 금방 죽다가 올라오기도 한다. 잘 설득하면 기회가 다시 열릴 수 있다.”
지난 30일 티몬·위메프(티메프) 지급 불능 사태 관련 국회 정무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 현장에서 구영배 큐텐그룹 대표는 기자들에게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지난 8일 위메프의 판매 대금 지연 사태가 발생한 지 22일 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사태 발생 후 두문불출하던 구 대표가 모습을 드러내자 피해자들은 그가 작은 대책이라도 내놓길 기대했다. 그러나 구 대표는 해결 방안은커녕 피해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상품권 할인을 남발하고 긴 정산 주기를 활용해 판매 대금을 기업 인수 자금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전자상거래(이커머스) 업체가 십 수년간 이어온 행태”라며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고 시장을 키우기 위해 글로벌로 가려 했다”는 식의 횡설수설을 반복했다. ‘이커머스 신화’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날 그에게 질의한 유영하 국민의힘 의원은 “부도덕한 한 사람의 망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는가.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변명과 궤변으로 자기합리화만 했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재무 파트만 쏙… 인수사 곳간 마음대로 쓴 큐텐
31일 업계에 따르면 티몬과 위메프는 할인 쿠폰을 남발하고,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 상품권을 파격적인 가격에 할인 판매했다. 구매 고객이 상품값을 지불하면, 두 달 뒤 판매자에게 정산하는 식으로 ‘돌려막기’ 운영을 했다. 그러나 판매 대금 일부가 모기업인 큐텐의 경영 자금으로 유용되면서 한계에 부딪혔다. 금융감독원은 두 업체의 미정산 대금을 최소 2100억원 수준으로 추산했다. 이는 지난 5월분 미정산액을 추정한 것으로, 6·7월 판매분까지 더하면 피해액은 더 불어날 것이 자명하다.
업계에선 큐텐이 물류 자회사인 큐익스프레스의 미국 나스닥 상장을 위해 부실한 이커머스 기업들을 잇달아 사들여 무리하게 거래액을 부풀려오다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고 보고 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큐텐은 2022년부터 올해까지 티몬, 인터파크커머스, 위메프, 미국 온라인 쇼핑몰 위시, AK몰 등을 인수했다. 대부분은 큐텐의 지분과 교환하는 방식이었지만, 일부 플랫폼은 돈을 주고 인수했다. 본사가 자회사 돈을 마음대로 끌어 쓸 수 있는 기형적인 구조 덕분에 가능했다.
큐텐은 티몬·위메프를 인수한 후 개발과 재무 업무를 큐텐의 정보통신(IT) 자회사인 큐테크놀로지 소속으로 흡수·통합했다. 그리고 이들 플랫폼에서 들어온 판매 대금을 본사의 경영 자금으로 썼다. 지난 2월 인수한 미국 플랫폼 위시의 경우 2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400억원이 인수 자금으로 사용됐다. 이때 큐텐은 티몬·위메프의 판매 대금을 끌어다 썼다. 이날 구 대표는 “(위시를) 2300억원에 인수했지만 (실제) 들어간 자금은 400억원”이라며 “그 부분은 일시적으로 티몬·위메프을 동원해서 차입했고, 한 달 내에 상환했다”고 인정했다.
상환금은 위시의 유보금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이사회 등 내부 절차를 거쳤고, 이는 판매자 정산 지연 사태와는 관련이 없다는 게 구 대표의 주장이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는 구 대표가 티몬·위메프 판매 대금을 다른 용도로 썼다면 배임·횡령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법무부는 구 대표와 함께 류광진 티몬 대표, 류화현 위메프 대표에 대해 출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부실기업 껴안은 건 엑시트 위한 ‘사기극’
구 대표는 “최종 책임은 기업을 잘못 운영한 저(에게 있다)”라며 “제가 가진 100%를 동원하겠다”고 했다. 동원할 수 있는 그룹의 시재(時在) 800억원에 본인이 가진 큐텐 지분(38%)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해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한때 2조원까지 갔던 큐텐의 기업가치를 기준으로 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지만, 현재는 신용을 잃어버려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그는 시재 800억원도 당장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구 대표는 그나마 현실화 가능성이 있는 큐익스프레스의 지분(29.4%)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큐익스프레스는 올 하반기 몸값 10억 달러(약 1조3843억원)를 목표로 나스닥 상장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구 대표는 티몬·위메프 사태가 커지자 지난 27일 큐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CEO)를 사임하고 “이 회사는 이번 사태와 관련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위기 상황에도 나스닥 상장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구 대표가 상장에 집착한 이유는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위해서라는 해석이 많다. 그에 따르면 지마켓을 매각하고 손에 쥔 715억원은 모두 큐텐 사업에 쓰였다. 큐텐은 2021년까지 누적 적자가 4299억원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였지만, 구 대표에겐 ‘쿠팡의 손정의’처럼 적자경영을 지원할 ‘큰손’이 없었다. 큐텐 창업 당시 합작했던 미국 이베이와는 2018년 일본 사업인 큐텐재팬을 넘기는 조건으로 결별했다.
이에 자금 마련을 위해 무자본으로 부실기업들을 인수해 덩치를 키워 물류 자회사를 나스닥에 상장시키는 방법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계획은 먹혀들어 큐텐과 지분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티몬·위메프를 인수했다.
싱가포르 기업청에 따르면 큐익스프레스의 최대 주주는 보통주 기준 지분 65.9%를 가진 큐텐이고, 2대 주주는 지분 29.4%를 가진 구 대표다. 우선주 주주로는 서울 소재 퀸홀딩스(91.8%)와 미국 소재 리벤델인베스트먼트(8.2%)가 올라와 있다. 큐텐은 구영배 대표가 지분률 42.7%로 최대 주주고, 과거 티몬 대주주였던 앵커PE와 KRR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몬스터홀딩스가 25.6%를, 과거 위메프 대주주였던 원더홀딩스가 18.0%를 갖고 있다. 우선주는 대부분 투자회사가 가졌다.
이번 사태에 대해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은 처음부터 ‘계획된 사기극’이라 진단했다. 유 원장은 “구 대표는 이베이와 합작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큐텐재팬을 떼어주며 헤어졌다”며 “이후 한국의 적자 플랫폼들을 무자본으로 끌어안았고, 이를 통해 큐익스프레스를 상장해 투자금을 회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돈을 주고 미국 플랫폼 위시를 인수한 이유는 글로벌 플랫폼을 활용해 상장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이복현 “구영배 ‘양치기 소년’ 같아… 불법행위 포착”
구 대표는 지난 29일 본인의 사재를 출연해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발표와 티몬·위메프의 기업회생 신청을 8시간의 시차를 두고 진행했다. 이날은 정부가 판매 대금을 정산받지 못한 소상공인·중소기업을 구제하기 위해 56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날이어서 피해자들의 충격이 컸다.
업계에선 기업회생 신청 준비가 최소 1주일 정도 소요되는 만큼, 애초에 구 대표가 판매자들의 대금 지급 변제에 대한 의지가 없었을 거란 해석이 나온다. 실제 환불을 받기 위해 티몬과 위메프 사무실을 찾은 소비자들이 발견한 직원들의 메모에선 ‘환불 오늘부터 X’ ‘정상화 어려움 판단’ ‘기업회생 고려’ 등의 내용이 나왔다.
회생이 개시되면 부채 일부가 탕감돼 피해자들은 판매 대금 중 일부만 돌려받을 수 있다. 법원이 기업회생 절차를 받아들이지 않아 파산하게 되면 자산 등을 팔아 정산받을 수 있는데, 현재 두 회사가 자본잠식 상태인 데다 부동산도 갖고 있지 않아 아무것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대금을 받지 못하는 판매사는 물론, 멀쩡히 대금을 받고 사업을 하던 판매사까지 줄도산할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다.
티메프 사태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은 사라진 판매대금을 추적하고 있다. 정무위 현안 질의에서 이복현 금감원장은 “회사로도 개인으로도 자금 조달 계획이나 담보 제공 여부를 여러 차례 구했으나 ‘양치기 소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서 “큐텐 측의 말을 신뢰하지 못해 지난주부터 자금 추적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강력한 불법 행적을 발견했다”라고 했다.
시스템이 무너진 티몬·위메프에선 직원들의 줄퇴사도 이어지고 있다. 티몬의 경우 상품권본부장과 디지털본부장 등 핵심 관계자는 사태 발생 전 이미 회사를 떠났고, 이후 홍보 인력이 퇴사했다. 정산이 지연된 와중에도 판매자들을 설득해 핫딜(염가) 상품을 만들어내던 상품기획자(MD) 상당수도 회사를 떠났다.
양사의 임직원 수를 합치면 1000명에 이른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티몬과 위메프는 퇴직 연금도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퇴직금 정산이 어렵게 되자 일부 퇴사자들은 사측에 권고사직으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다른 계열사로도 번질 조짐이다. 인터파크 쇼핑과 AK몰을 운영하는 인터파크 커머스는 이날 판매자 정산 대금 지급이 지연되고 있다고 밝혔다.
구 대표는 이날 ‘사기를 의도하지 않았다. 최근 경쟁 환경이 격화돼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한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시장을 키워줘야 한다. 그래서 해외로 가려 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번 반복했다. 스스로도 상식적이지 않다고 여긴 듯 “믿기 어렵겠지만” “헛소리 같겠지만”이라는 표현도 덧붙였다. 미정산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양해해 달라”고 했다. 한때 지마켓을 창업해 나스닥에 상장하고, 이를 매각해 큰돈을 쥔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사기와 횡령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힐 위기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