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박수진씨(가명)는 평소에는 지출을 줄이는 ‘무지출 챌린지’나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만 소비하는 ‘냉장고 파먹기’ 등을 하다가도, 생일이나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엔 고가의 상품이나 호텔 디저트를 즐기는 ‘작은 사치(스몰 럭셔리)’를 즐긴다.

박씨처럼 불황기에도 소비자들은 가치소비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치소비는 각국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한국보다 평균 연봉이 두배 가량 높은 미국 직장인보다 국내 소비자들의 자기 보상 소비가 더욱 활발한 것으로 조사됐다.

27일 딜로이트컨설팅이 19개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단순하고 원초적인 자극에 지갑을 열고, 가성비와 과시성 소비 양극단의 소비 경향을 보였다.

김태환 딜로이트컨설팅 소비자 부문 리더(전무)는 “최근 몇 년간 주된 소비층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전에 없던 소비자들의 구매 행동 변화가 감지됐다”면서 “(현 소비자는) 무조건 아끼기 보다 자신의 소비 지출을 주도적으로 관리하고 가치 소비를 한다”라고 진단했다.

어글리어스가 판매하는 친환경 못난이 농산물. /캐비지 제공

◇불황이라고 무조건 아끼나? No!

딜로이트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의향 지수’는 2022년 9월 이후 줄곧 ‘0′을 밑돌고 있다. 소비의향 지수는 소비자가 향후 4주 내 예상 총지출 금액 변동률(%)로, ‘0′보다 높으면 소비 증가 계획이 있고 낮으면 소비 절감 계획이 있는 것으로 본다.

미국의 경우 2021년 12월 이후 올해 2월까지 소비의향 지수가 줄곧 ‘0′ 이하로 집계됐다. 이에 딜로이트는 경기 침체와 고금리 고물가가 길어지면서 올해부터 ‘소비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진단했다. 저렴하고 저용량·패키징 제품의 수요가 확대되는 추세가 이를 방증한다.

한국은 지출을 아끼는 소비 패턴이 감지되고 있지만, 무조건 아끼기보다는 자기 주도적 소비 경향이 확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무지출 챌린지’ ‘현금 챌린지(현금만 이용하는 것)’ 등을 하는 짠테크(불필요하는 소비를 줄이고 낭비를 최소화해 돈을 모으는 것) 소비가 유행처럼 번진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무조건 안 먹고 안 쓰며 돈을 모았던 기성세대와 달리, 이들은 갖고 싶은 것을 소비하기 위해 절약한다. 평소엔 불필요한 지출을 피하다, 해외여행이나 취미 활동에 지갑을 여는 식이다.

동시에 단순하고 원초적이며, 자극적인 콘텐츠 수요가 증가하는 것도 재정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나타난 태도라고 딜로이트는 분석했다.

그래픽=딜로이트컨설팅

◇과일값 비싸 ‘못난이 과일’ 먹어도 ‘스몰 럭셔리’ 포기 못 해

식품 소비에서도 더 저렴하고, 더 적게, 더 오래 먹을 수 있는 제품을 찾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식품가 인상(전년 대비 10.5% 증가)으로 인해 육류를 식물성 대체육과 유제품으로 대체하고, 신선 채소 대신 냉동 제품을 구매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 또 유통기한과 상관없이 제품의 상태를 확인하고 섭취를 결정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국내 역시 못난이 채소·과일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다. 과거엔 흠이 난 과일은 상품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됐지만, 최근 과일값이 폭등하면서 백화점에서도 ‘흠과’를 파는 게 일상화됐다.

신세계백화점의 경우 지난 15일부터 4일간 전국 10개 점포에서 못난이 과일·채소를 판매한 결과, 청과 매출이 전년 대비 25%가량 증가했다. 이 백화점은 2022년 두 차례 행사에서 약 25톤(t)의 못난이 과일·채소를 판매했고, 올해 판매 품목을 기존 5종에서 올해 11종으로 확대했다.

식재료 가격 상승에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이 완제품이나 반조리 형태의 간편식을 구매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외식 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분기 이래 매 분기 6∼8%대로 고공 행진하고 있다. 이는 해당 기간 전체 물가상승률(3∼5%)을 웃도는 수치다.

롯데마트의 경우 지난해 간편식 자체 브랜드(PB) ‘요리하다’ 매출이 전년 대비 20% 증가했고, 같은 기간 이마트(139480) PB ‘노브랜드’ 간편식 매출도 약 15% 늘었다.

◇SNS 문화로 과시성 구매도... 韓 “경제불안 탈출 및 자기만족 위해 소비”

먹거리 소비는 가성비 위주지만, 기념일 등에 고가 상품을 지출하는 ‘스몰 럭셔리’ 수요는 증가세를 보인다.

특히 미국과 비교해 국내 소비자들은 과시성 구매가 더 두드러졌다. 딜로이트 조사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들은 한 달간 과시성 구매에 8만원, 미국 소비자는 약 6만원(45달러)을 쓰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래픽=딜로이트컨설팅

올해 미국 직장인 평균 연봉이 8만3464달러(약 1.1억원)로 국내 직장인 평균 연봉(4214만원)의 약 2배지만, 자기 보상 소비는 국내 소비자들이 더 활발했다.

이외에 일본은 과시성 구매가 4만4359원, 프랑스는 7만2803원, 중국은 18만4945원에 육박했다.

지난 한 달 내 과시성 구매를 한 미국 소비자 중 구매 유도 요인은 스트레스 해소 및 위안(22%), 취미 여가(15%), 실용성(12%) 순으로 집계됐지만, 한국 소비자의 구매 유도 요인은 실용성(15%), 스트레스 해소·위안(15%), 취미·여가(13) 순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세대들이 주 소비 계층으로 부상한 것이 이유로 분석된다. 딜로이트는 “미국 소비자는 먹고 입는 것으로 자신의 생활 수준을 표현하지만, 한국 소비자는 경제 불안 탈출 심리와 자기만족을 위한 실속 지향 소비가 두드러진다”라고 했다.

딜로이트는 소비자 구매 행동을 ▲가치 중심 소비 ▲단순하고 원초적인 것에 소비 ▲중간이 없는 소비로 나누고 이에 맞는 대응 전략을 제시했다.

증폭된 지출 불안감을 가치소비로 해소하는 소비자에게는 개인 맞춤형 제품이나, 체험 후 구매 옵션을 제공하는 것이 적합하다.

현실 도피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원초적 소비자에는 제품이나 서비스 전달 과정을 단순화하고, 고자극 메시지를 소구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리워드(보상)나 할인보다 직접적인 보상이나 막장 콘텐츠, 사이다식 서사나 SNS용 이미지 배포 등이 적절하다는 조언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욕망을 채우는 중간 없는 소비자에겐 초저가·초대형을 내세운 한정 수량 판매로 희소가치를 확보하는 것이 통한다.

김태환 리더는 “현재의 불황은 ‘새로운 소비자’라는 과거와 다른 변수가 등장했다”면서 “불황을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소비 심리와 그에 따른 행동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기업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언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한국, 미국 등 총 19개 국가에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소비자 국가별 오차범위는 ±3%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