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무조건 잃지만 끊을 수 없다. 경마장은 노인에겐 천국이자 지옥같은 곳이다.”
지난 2일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한 ‘렛츠런파크 서울’ 실내 중계소에서 만난 이 모(66)씨의 말이다.
이씨는 “경마장을 찾은지는 10년이 넘었다. 오면 복작복작해 마음이 신난다”면서 “딴 날은 기분이 좋아 돈을 허투루 쓰니 의미가 없다. 노름쟁이는 인간 말종이니 상종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전날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80만원을 날리고 이날 다시 경마장을 찾았다.
경기 포천에서 왔다는 박모(58)씨는 “왜 이렇게 안좋은걸 배우려고 왔느냐”면서 “10만원 벌면 20만원 잃게되는 곳이다. 재미 삼아 몇번만 하다가 얼른 돌아가라 큰일난다”고 만류했다. 일용직으로 일하는 박씨는 유일한 낙이 경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터라 휴일에는 무조건 경마장을 찾는다.
이날 렛츠런파크 실내 경마 중계소는 경마를 시청하는 노인들로 가득했다. 영하권 추위에 강풍까지 불어 실외 경기장에는 관람객이 없었다. 다들 손에 마권과 경마 정보지를 잡고, 베팅을 위해 골몰하는 모습이다. 일부는 순위에 대한 수다를 삼삼오오 떨기도 했다. 경기가 무르익자 순위 현황을 보며 기수를 향해 “때려”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발표한 ‘2020 사행산업 이용실태조사’를 보면, 평생 기준 사행활동 경험률 질문에서 경마 마권을 구매했다는 응답은 50대가 45.8%, 60대 이상은 44.2%다. 40대 미만은 16.7%로 급격히 줄었다. 50대 이상부터는 절반 가까이가 경마장 방문 경험이 있는 셈으로, 경마장 방문 대부분이 50대 이상부터 시작된 뜻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경마장이 외로운 노인에게는 유일한 낙이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돈을 잃어도 외로움을 달랠 수 있어 발걸음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경마장은 입장료 2000원을 내면 폐장 시간(오후 5시)까지 머물 수 있다. 추운 날이나 더운 날 실내에 눈치 보지 않고 머물 수 있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경마 얘기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도박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사행성 도박 경험자 2882명 중 36.5%가 ‘혹시 돈을 따지 않을까 싶어서’라고 답했고 27%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도박장을 찾는다고 답했다. 고령층은 돈뿐만 아니라 말동무를 찾아 경마장을 찾고 있는 셈이다.
경기가 있는 금토일마다 경기장을 찾는데 말 얘기로 경마장에서 친해져 대화를 나누고, 돈을 딴 사람이 식사나 술을 대접하기도 한다.
정구천(70)씨는 “저쪽에 있는 사람은 돈 따는 날에는 사라지는데 나는 워낙 착해 내가 따면 우유라도 사온다”고 말했다.
박문갑(67)씨는 경마에 취미를 붙인 지가 20년째다. 경기가 있는 날마다 경마장에 간다. 박씨는 이날도 오전 9시 경마장에 도착해 입구에서 5000원짜리 경마장 전문지를 2개 샀다.
출전마의 경기 기록과 훈련 현황을 보고 어떤 말에 베팅할지 정한다. 전문지 판매소에서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인을 위해 돋보기도 함께 판다. 그는 경마로 일주일에 평균 30만~40만원을 잃는다고 했다.
송기철(69)씨는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도 특히 봄철에, 꽃을 보러 많이들 놀러온다. 그런데 금토일 매일매일 오는 사람들은 다 늙은 노인들“이라면서 “할일이 따로 없으니 경마도 보고 사람들이랑 얘기하러 오는거다. 결국 돈 벌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젊은 사람들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말아라”고 말했다.
◇ “이번에 잃어야 더 안온다” 만류… 130배 번 사람도 나와
이들은 기자가 경마를 하는 법에 대해 묻자 모두 경마를 시작조차 하지 말라며 말렸다. 큰돈을 쓰지 말고 최소한의 베팅을 걸라고 조언했다.
기자가 베팅을 한 경기는 제주 경마장에서 진행됐다. 1400m를 달리는 경기였다. 주위 베테랑들의 조언을 받아 2, 3, 4, 8번의 말에 복연승(두마리 찍은게 3위 안에 모두 들면 당첨) 으로 6000원을 걸었다. 마권을 들고 다시 찾아가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너가 이번에 잃어야 여길 안온다”고 말하며 웃었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리자 경마장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결과에 따라 환호성과 욕설이 교차했다. 결승선에는 8번,6번,1번,9번 말이 들어왔다. 기자도 틀려 모두 잃었다. 배당이 낮았던 다크호스 6번 말이 2등으로 들어오면서 반전이 펼쳐지자 ‘사기’라는 욕설도 들려왔다.
구모(56)씨는 “경마는 결국 야바위다. 못달리는 말도 기수도 먹이고 월급을 줘야하니까 저렇게 경기 결과를 미리 조작해서 하는거다. 중독성 때문에 알면서도 못 끊는다”고 말했다.
일부에겐 일확천금의 순간이 터지기도 했다. 한 남자가 이번 경기에서 130배 배당에 적중한 것이다. 고배당을 딴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위가 웅성댔다. 그는 얼마를 땄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라졌다.
◇ 방문객 절반이 중독… 중독 노인 방치하는 마사회
노인들은 경마 중독이 무섭다며 기자를 계속 만류하면서도, 본인들은 경기마다 지속해서 마권을 구입했다. 대개 일용직이나 택시운전을 하거나, 기초급여 등을 받아 경마장에 올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을 경마에 모두 날리기도 한다.
이모(64)씨는 “돈이 많은 노인들은 골프 같은 걸 치고, 주위에 친구도 많겠지만 가난하면 시간을 때울 일이 마땅치 않다”면서 “큰 돈이 없으니 여기 와서 경마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사람을 사귄다”고 말했다.
방모(68)씨는 매달 받는 생계급여와, 노령연금, 주거비 등 정부 지원금을 모두 더한 약 80만원의 약 70%를 경마장에 쓴다. 방씨는 “대부분 잃지만 운이 좋으면 큰 돈을 벌을 수도 있으니 온다”면서 “어차피 희망이 없는 삶인데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래도 다 착한 사람들이다. 가끔 돈을 딴 사람들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니 좋다”고 말했다.
분당제생병원 가정의학과팀이 2017년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경마장 방문객의 47.5%가 병적 도박그룹, 즉 경마 중독으로 판정됐다. 경마장을 찾는 절반은 심각한 중독 상태라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마사회가 경마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권 구매 한도가 1인 1회 10만원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발권기를 옮겨가며 베팅을 해도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날도 김 모(54)씨는 2시간 만에 30만원을 잃었다.
한국마사회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까지 5년 동안 구매자의 마권 구매 한도를 ‘1인 1회 10만 원’으로 제한한 규정을 위반해 사행산업감독위원회(사감위)로부터 시정조치를 9200여 건 받았지만 계도·홍보 외에 다른 조처를 전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