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식음료(F&B) 콘텐츠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통 플랫폼’ 사업자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자사 점포 밖에 매장을 내는 것도 불사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선 최근 백화점의 성장세가 정체하자, 신성장 동력으로 콘텐츠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롯데백화점은 ‘커피계의 에르메스’라 불리는 싱가포르 바샤커피의 국내 프랜차이즈 및 유통권을 단독으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바샤커피는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기원된 브랜드로 현재 싱가포르, 프랑스, 홍콩, 두바이 등 9개국에서 총 18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화려한 디자인의 로고와 포장으로 국내에서도 싱가포르에 여행 가면 꼭 사 오는 선물로 인지도가 높다.
이번 계약은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가 주도한 것으로, 바샤커피 운영사인 싱가포르 V3고메 그룹의 BACHA COFFEE PTE, LTD사(社)를 18개월간 직접 설득한 끝에 계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백화점은 바샤커피 1호점을 백화점이 아닌 외부에 선보일 예정이다. 오는 7월 서울 청담동 명품 거리에 첫 매장을 연다. 이어 백화점 등 다양한 채널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전자상거래(이커머스) 및 기업간(B2B) 시장도 적극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롯데 측은 단순 백화점 내부 콘텐츠를 넘어 자체 럭셔리 콘텐츠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같은 유통 전략을 짰다고 설명했다. 향후 프랜차이즈 사업을 염두에 두고 계약을 체결했으나,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밝히기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롯데백화점은 또 바샤커피와 같은 새로운 콘텐츠 발굴에 주력하기 위해 올 초 조직개편에서 대표 직속으로 ‘콘텐츠부문’을 신설했다. 콘텐츠부문장은 청량리점 점장으로 있던 이주현 부문장이 맡았다. 조직 내에는 바샤커피를 포함해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더콘란샵, 시시호시 등의 운영 업무가 포함됐다.
롯데쇼핑(023530) 관계자는 “바샤커피를 시작으로 롯데백화점만의 차별화된 콘텐츠를 강화할 계획”이라며 “패션·라이프스타일·F&B 등에서 특별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유치해 프리미엄 고객 경험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했다.
갤러리아백화점을 운영하는 한화갤러리아(452260)는 지난해 미국 수제버거 브랜드 파이브가이즈의 국내 사업권을 획득하고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
한화 3남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 부사장이 주도한 것으로, 역시 갤러리아백화점에 들어가는 대신 강남대로와 더현대서울에 매장을 열었다. 올해 상반기 신세계 강남점과 서울역에 매장을 추가하는 등 향후 5년간 15개 이상의 매장을 개장할 예정이다.
지난해부터 한화갤러리아는 ‘넘버원 프리미엄 콘텐츠 프로듀서’를 슬로건으로 이베리코, 와인 수입 등 F&B 신사업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2017년부터 영국 왕실 홍차 브랜드 포트넘 앤 메이슨을 국내에 단독으로 선보이고 있다. 신세계푸드(031440)가 들여와 신세계백화점에서 단독으로 유통하는 구조다.
1707년 출범한 포트넘 앤 메이슨은 프리미엄 홍차, 쿠피, 다기, 굿즈 등을 판매하는데 국내에서도 탄탄한 마니아층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아 이달 2일부터 진행된 설 예약 판매에서 일주일간 매출이 30% 이상 신장했다.
백화점들이 콘텐츠 사업을 시도하는 이유는 백화점만으로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지난해 3분기 롯데, 신세계, 현대 등 ‘빅3′ 백화점의 영업이익은 모두 감소했다. 코로나발 보복소비가 잦아들면서 백화점의 핵심 상품군인 명품·패션 판매가 부진한 것이 이유다.
증권가는 4분기 백화점 성장률이 반등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올해 백화점 산업 성장률은 2%로 추정되고 있어 당분간은 업황 회복이 어려울 전망이다.
백화점들이 콘텐츠 중에서도 특히 F&B 사업에 집중하는 이유는 불황에도 백화점 식음료 매출이 두 자릿수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현대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등이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2004년생)가 좋아하는 유명 F&B 매장을 입점시켜 젊은 층의 집객 효과를 누렸다.
업계 관계자들은 백화점에서도 오래 체류하며 즐기는 ‘체험형 쇼핑’이 대세가 된 만큼, 이를 뒷받침하는 데 식음료만 한 게 없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롯데월드타워를 통해 백화점에 처음 입성한 런던베이글뮤지엄의 경우 해당 매장에서 한 달에만 15억원가량의 매출을 거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음료 사업의 위상을 확인한 백화점으로썬 F&B 콘텐츠 운영에 직접 나서는 게 자연스럽다는 평가다.
백화점 내부가 아닌 외부에 매장을 개설하는 것에 대해선 ‘새로운 상권을 시험하는 기회’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백화점 점포 하나를 세우는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고 새로운 부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면서 “F&B 매장은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자사 백화점이 진출하지 않은 신사업과 상권을 테스트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다만, 일각에선 신사업으로 인해 본업 경쟁력이 약화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실제 지난해 파이브가이즈 사업에 집중한 갤러리아는 핵심 점포인 압구정 명품관, 대전 타임월드 등 5개 점포 매출이 모두 줄었다. 주가도 1100원대로 상장가 반토막 수준으로 떨어졌다.
업계는 코로나 엔데믹으로 명품 소비가 줄면서, 명품 포트폴리오에 치중한 갤러리아의 매출 감소 폭이 컸다고 분석한다. 경쟁사들이 색다른 쇼핑 경험 제공을 위해 지속 변신하는 반면, 갤러리아는 변화에 더뎠다는 평가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차별화된 콘텐츠 확보는 백화점의 영원한 과제”라며 “F&B 사업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건 긍정적이지만, 본업과의 시너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