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헬리녹스(Helinox)의 성장세가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 토종 브랜드로 독보적인 기술과 디자인으로 글로벌 캠핑용품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데 이어, 최근에는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기고 세계 시장을 향한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했다.

이 성장 스토리에는 아버지의 가업(家業)을 시대정신에 맞춰 이어 간 아들의 기업가 정신이 있다.

헬리녹스는 한국에서 탄생했다. 1988년 라제건(69) 대표가 설립한 동아알루미늄(DAC)이 고강도 알루미늄 텐트 폴(뼈대)로 만든 텐트와 캠핑 의자 등을 노스페이스·REI 등 아웃도어 브랜드에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납품하다, 2009년 ‘헬리녹스’라는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판 것이 시작이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동아알루미늄이 위기에 빠지자,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아들 라영환(39) 대표가 휴학하고 아버지 일을 도우며 현재의 브랜드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라제건 대표는 헬리녹스 블로그에 당시의 일화를 직접 언급하며 “처음 등산스틱을 개발한 후 라영환 대표가 동대문 등을 돌며 열심히 판매처를 개척하려 애썼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브랜드에 비싼 가격의 제품이 당시엔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래픽=정서희

2012년 출시한 무게 850g 캠핑 의자 ‘체어원’이 인기를 끌면서 헬리녹스는 이듬해 독립 법인으로 분사했다. 라영환 대표는 아버지가 개발한 기술에 브랜딩을 결합해 헬리녹스를 캠핑 애호가들의 워너비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이 회사가 만든 파란색 폴(뼈대)이 들어간 캠핑 의자 ‘체어원’은 가볍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캠핑 애호가들 사이에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인기다. 슈프림, 나이키, 루이비통, BTS 등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도 줄을 잇는다.

전 세계 텐트 폴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지만, 정작 자신의 브랜드가 없던 아버지의 한을 아들이 풀어냈다는 평이 나왔다.

라제건 대표는 나이키와의 협업을 들어 “브랜드 대 브랜드인 ‘콜라보(협업)’를 위해서 나이키 캠퍼스를 방문한 아들이 참 자랑스러웠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6년 235억원이던 헬리녹스의 매출은 지난해 770억원으로 뛰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5억원에서 78억원으로 2배 이상 늘었다. 현재 29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전체 매출의 70%가 해외에서 나온다.

헬리녹스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누적 매출은 한국(48%), 미국(20%), 일본(17%), 유럽(10%) 등 주요 시장에서 모두 성장했다.

아버지 회사인 동아알루미늄도 덩달아 성장했다. 올해 6월 결산인 동아알루미늄의 연 매출은 611억원으로 전년 대비 24% 증가했다. 이중 헬리녹스와의 거래를 통한 매출은 322억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영업이익은 27% 증가한 200억원이었다.

헬리녹스 브랜드 출범 초기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아웃도어용품 전시회에서 등산스틱을 전시하며 사진을 찍은 라제건 동아알루미늄 대표(왼쪽)와 아들 라영환 헬리녹스 대표. 이 사진은 2019년 라제건 대표가 브랜드 설립 10주년을 회고하며 헬리녹스 블로그에 직접 올린 것이다. /헬리녹스 블로그

헬리녹스는 2019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300억원), 2021년 IMM인베스트먼트(400억원)로부터 투자를 유치했고, 올해 3월에는 아주IB투자와 미래에셋벤처투자 등으로부터 총 1200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이를 활용해 2027년 해외 상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5월 라영환 대표는 싱가포르에 지주회사 헬리녹스유한책임회사(Helinox Pte. Ltd.)를 세우고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했다. 이에 따라 한국법인 대표는 지난 7월 강연수 상무로 바뀌었다. 라 대표는 기타비상무이사로 한국 법인의 이사회 의장을 맡을 예정이다. 사측은 한국과 미국, 유럽 법인의 지역별 대표 체제를 강화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지난달 5일 기준 헬리녹스의 주주 구성은 아주IB(28.9%), IMM(20.7%), 미래에셋(5.4%) 등 사모펀드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최대 주주인 라영환 대표의 지분은 60%대에서 40%대로 감소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라 대표가) 차등의결권(복수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획득함으로써 지배력을 오히려 강화했고, 추후 상장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헬리녹스 캠핑 의자. /헬리녹스

헬리녹스는 글로벌 진출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지난해 베트남 호찌민에 직영 소싱(조달) 사무소를 설치해 가동 중이며, 관계사인 동아알루미늄도 베트남 하노이에 기존 한국 공장보다 큰 규모의 생산공장을 완공해 올해 초 양산을 시작했다.

또 올해 5월 일본에 플래그십스토어(대표 매장) 헬리녹스크리에이티브센터 도쿄(HCC 도쿄)를 열었다. 내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매장을 선보일 예정이고, 2025년에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미국 내 첫 번째 헬리녹스크리에이티브 센터를 열 예정이다.

헬리녹스는 이제 모회사보다 더 유명해졌다. 시장에선 아들(헬리녹스)이 아버지의 사업(동아알루미늄)을 인수하는 수순을 밟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헬리녹스는 2019년 아버지 라제건 대표 등이 보유한 동아알루미늄 지분 15%가량을 추가 매입해 약 25%의 지분을 확보했다.

아버지의 주식 엑시트(EXIT·출구전략)까지 짜주면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는 평가다. 동아알루미늄의 최대 주주는 라제건 대표 외 2인의 특수관계자(58.39%, 올해 6월 말 기준)다.